집성촌|경북 봉화군 봉성면 원둔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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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경북 봉화군 봉성면 원둔리. 태백의 준령이 뻗어내려 고봉을 이룬 망일봉기슭에 모여사는 영해박씨들은 고려말 운봉(현 안동군예안면) 현감을 지낸 박구의 후손들로 조군개국과 함께 절의를 위해 입신의 길을 스스로 저버린 가문이다.
박구는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훌훌 떨쳐버리고 심심산골 예안면 기사(벼슬을 버린다는뜻) 리로 은둔,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글은 배우되 벼슬길에는 나가지말라』는 유인을 남겼다.
이마을 입향조는 그의 6세손인 박전, 박흡, 박익 등 3형제. 4촌형제간인 이들은 임진왜란당시 기사리에서 이곳 봉성지방으로 피신, 황무지를 개척하고 영해박씨의 뿌리를 내렸다. 봉성면일대 약l백50여가구 7백여명이 모두 이들 3형제의 후손들.
『박구할아버지 후손들중에는 벼슬길에 오른 이는 거의 없었지요. 글은 배우되 벼슬길에는 오르지 말라는 유언을 따랐던 겁니다.』 박구의 22세손 박정호노인(79)은 이마을 「벼슬부재」의 배경을 이렇게 풀이한다.
그러나 이마을 박서방들의 선조는 음풍명월의 멋을 알았다. 순호씨의 집 안방에 소중히 보관된 가보 『임계오회도』는 그것을 잘 말해준다. 『임계오』란 지금부터 약4백년전에 조직된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친목계. 즉 임자년 계축년에 출생한 11명의 퇴직관리들이 모여 만든 「계」를 말한다. 계원은 이마을 입향조 박흡을 비롯, 전예조좌랑 권위, 유학(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 최전, 전안방 김윤사,전현감 안담수, 판사손 광홍등 안동·봉성지방의 선비들.
이들이 물맑고 산좋은 정자에 모여 음풍명월로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그린 한폭의 동양화가 바로 『임계오회도』다. 이 그림에는 당시 이들 선비들이 지었던 10여편의 명시가 함께 전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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