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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장인의 혼과 자연의 맛 ‘블렌딩’ … 위스키 종주국 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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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호 15면

1 산토리의 다카히사 후지 선임 매니저가 야마자키 증류소 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 야마자키 증류소의 전경. 야마자키 지역은 예로부터 물맛이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3 산토리의 싱글몰트 위스키 ‘야마자키(山崎)’. [사진 로이터산토리]

세계 최고의 위스키 평론가 짐 머레이는 최근 펴낸 위스키 가이드북 짐 머레이의 위스키 바이블 2015에서 세계 최고의 위스키로 일본 산토리의 싱글몰트 위스키인 ‘야마자키(山崎) 싱글몰트 2013’을 선정했다. 이 위스키는 셰리와인을 담았던 통에서 숙성한 게 특징. 머레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라며 100점 만점에 97.5점을 줬다. 2~4위는 미국산 버번 위스키가 차지했다. ‘야마자키 싱글몰트 2013’은 3000병만 한정 생산돼 유럽 지역에서 대부분 판매됐다.

‘위스키 변방’ 일본 산토리의 반란

일본이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 생산방식을 배워 간 지 90여 년이 지난 지금, 일본 위스키는 본고장인 스코틀랜드는 물론 전 세계에서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일본에서도 산토리 위스키가 50% 이상 시장을 차지하고 있다. 산토리 위스키는 국내에서도 인기다. 이 위스키의 독점 수입권을 갖고 있는 선보주류교역에 따르면 올해 들여온 1만7640병(750mL 기준)은 다 팔렸다.

90년 역사 … 2차 대전 때도 생산 안 멈춰
산토리 위스키가 세계 시장에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2007년이다. 당시 영국에서 열린 세계 위스키 품평회에서 산토리홀딩스의 ‘산토리 히비키(響) 30년’이 블렌디드 위스키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산토리는 올해 국제 주류평가대회인 인터내셔널 스피리츠 챌린지에서도 ‘히비키 21년’과 ‘야마자키 18년’, ‘하쿠슈(白州) 18년’ 등 18개 제품이 금상을 받았다.

최근 일본산 위스키가 본고장 스코틀랜드보다 각광받고 있는 이유는 뭘까? 산토리 위스키는 생산량을 늘리기보다 고품질의 제품을 꾸준히 소비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장 우선하는 건 기본 다지기. 우선 야마자키 및 하쿠슈 증류소에서 위스키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몰트 등은 대부분 스코틀랜드에서 수입한다. 오크통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맛과 향이 날 수 있도록 아메리칸 버번이나 셰리와인을 담았던 오크통을 꾸준히 확보한다. 여기에 일본산 참나무인 미즈나라 오크통을 개발해 사용하는 등 산토리 위스키만의 개성을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위스키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창업자인 토리이 신지로(鳥井信治郞) 때 시작됐다. 토리이는 1929년 첫 출시작인 ‘시로후다’의 실패를 계기로 단순히 스카치 위스키를 모방하는 것으론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신 동양인의 취향에 맞는 부드러운 맛 블렌딩을 연구해 37년 두 번째 위스키인 ‘가쿠빈’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산토리 위스키의 블렌딩에 창업자 가문인 토리이 일가가 직접 관여하는 전통도 이때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도 창업자 가문서 직접 블렌딩
산토리는 이후 산토리 올드(Suntory Old), 산토리 로열(Suntory Royal), 히비키(Hibiki), 일본의 첫 싱글몰트 위스키인 야마자키(Yamazaki) 등을 잇따라 발표했고 산토리 제품들은 때마침 일본의 경제 성장과 맞물리면서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산토리 위스키’가 일본의 국민주(酒)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일본의 국력과 함께 자라났다’는 인식 덕분이다. 산토리 위스키가 일본 내수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다.

산토리의 또 다른 힘은 다양성이다. 증류소별로 다른 특성을 지닌 위스키 원액을 서로 교환해 다양한 풍미의 위스키를 만드는 스코틀랜드와 달리 일본의 위스키 회사들은 서로 교류가 없다. 예를 들어 산토리와 경쟁사인 닛카위스키는 원액을 주고받지 않는다. 한 증류소에서 혼자 힘으로 다양한 개성을 지닌 몰트 위스키를 생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런 방식은 위스키를 생산하는 입장에선 약점이다. 하지만 산토리나 닛카위스키는 이런 약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자체적으로 여러 가지 위스키 원액을 생산하는 등 제품 개발 능력을 키운 것이다.

산토리의 야마자키 증류소를 예로 들면 2가지 타입의 워시백(Wash Back·1차 발효된 보리와 이스트를 넣고 재발효시키는 통), 6가지 다른 형태의 증류기, 5가지 타입의 숙성 캐스크 등을 조합해 약 60가지 스타일의 위스키를 생산할 수 있다. 위스키의 본고장인 스코틀랜드의 증류소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위스키의 맛을 결정하는 블렌딩에 들이는 공도 상당하다. 산토리의 창업자인 토리이가 가쿠빈, 산토리 올드 등의 제품을 직접 블렌딩했던 것처럼 지금도 창업자 가문의 토리이 신고 부사장이 직접 마스터 블렌더의 직책을 맡고 제품 개발과 생산을 챙긴다.

천혜의 자연환경도 무기다. 야마자키 증류소의 경우 위스키를 만들기 위한 최적의 조건인 뚜렷한 사계절과 안개가 자주 끼는 습윤 지역이라는 특징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야마자키 지역은 뛰어난 물 맛으로 유명하다. 일본 다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센노 리큐(千利休)가 다양한 차 맛을 시험한 곳도 이 지역이다. 여기에 창업자 가문의 열정이 더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증류소의 위스키 생산은 멈추지 않았을 정도다.

공급 달려도 품질 위해 생산 안 늘려
산토리는 맥주와 위스키 등을 통틀어 지난해 2조 엔(약 18조6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그동안은 일본 국내 시장에 집중해 왔지만 최근에는 해외 시장 공략에도 힘을 쏟고 있다. 올해 5월 세계적 명성의 버번 위스키인 짐빔(Jim Beam) 브랜드를 가진 미국의 증류주 대기업 빔을 인수한 것도 세계 시장 진출을 위한 준비의 일부다. 산토리에도 물론 아쉬운 점은 있다. 산토리 위스키를 찾는 수요는 꾸준하지만 수요에 맞는 공급량을 채우지 못하고 있어서다. 국내 수입사인 선보주류교역 역시 산토리 본사 측에 “더 많은 물량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산토리 측은 당장 무리하게 생산량을 늘리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제품의 숙성기간을 줄이고 생산량을 늘려 이익을 극대화하는 대신 품질이 보장될 때까지 공급량을 늘리지 않는다는 전략이다.

이수기 기자 retal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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