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의를 이긴 한국 마라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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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국 마라톤은 뉴델리에서 영광을 되찾았다. 무명의 신인선수가 아시안게임 마라톤을 제패하고 노년의 숙원이었던 국민의 소망을 시원히 풀어 주었다.
1958년 이창오 선수가 북경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한 이래 국제대회 1위의 영광을 차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4년만 이다.
실로 귀를 의심케 하는 쾌보요, 믿기지 않는 승리다.
그러나 사실은 엄연한 것이다. 김량곤 선수는 8개국 12명의 선수가 참가한 마라톤 레이스에서 2시간 22분 21초의 기록으로 당당 1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의 우승은 특히 일본과 북한의 마라토너들을 능가한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일본은 2시간9분대의 「세꼬」「소오시게루」「소오다까시」등 세계적 선수들을 아끼고 2시간 10여분대의 「아베」 를 출전시켰으며 북한도 역시 2시간14분,16분을 기록한 이종현, 소창식을 기용하며 우승을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인 김량곤은 이들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그는 지난번 서울 국제마라톤에서 2시간19분41초로 11위를 기록했을 뿐, 마라톤대회 출전 네 번만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우승기록은 물론 아주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한국기록 2시간16분15초 보다 6분이나 처지는 기록이며 「살라자르」의 세계기록 2시간8분13초보다는 무려 14분이나 뒤진 기록이다.
그러나 기록은 어느 의미에서 상대적인 것이다. 마라톤하기에 적합한 날씨에 좋은 코스에서 훌륭한 적수들과 겨루는 경우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김 선수가 2시간10여분대의 일본, 북한 선수들과 겨뤄 이겼다는 사실과 인도의 풍토와 기후에 익숙한 인도 선수들마저 물리쳤다는 사실이다.
어제 인도의 기온은 섭씨25도, 습도는 80%로 마라톤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날씨였다.
김 선수가 낯선 코스에서 무더위와 강적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은 역경에 강한 실력을 확인해 준다.
마라토너로서의 기술과 체력과 정신력에서 그는 의심할 바 없이 훌륭했다.
더우기 그가 무더위에 대비해 훌륭한 작전을 세웠다는 것은 더욱 대견스럽다. 초반에 레이스를 줄이고 중반에 스퍼트 하여 앞서가는 북한과 일본선수를 34㎞지점에서부터 따라잡은 저력에 대해서도 칭찬하고 싶다.
김량곤의 마라톤 우승은 우연이거나 요행은 아니다. 그의 저력이며 각고의 결실이다.
그러니까 그 동안 침체에 빠져 허덕이던 한국 마라톤을 다시 일으키는 데도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
고난과 설음 속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기에도 힘겨웠던 한국 마라톤에 새로 긍지와 희망과 용기를 준 활력소도 된다.
한국마라톤은 지난20여년간 현저한 낙후를 실감하면서 거의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었다. 기록향상의 부진은 두말할 것이 없고 심지어 부정과 조작승부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지경에까지 물렸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마라톤은 아시안게임에서의 우승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선수의 저변확대는 지금 제1의 과제가 되고 있다. 유망한 신인들을 발굴하고 이들을 훌륭히 키워야하는 일이 당면 과제가 되었다. 김량곤 선수의 우승으로 일만 불이 당겨진 마라톤중흥의 의욕이 선수발굴과 선수의 육성에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마라톤은 물론 지구력과 연습량으로 훌륭한 선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종목이긴 하지만 과학적 체력관리와 훈련계획이 밑받침되어야 더 효율을 얻을 수 있다.
지금부터 마라톤 계가 더욱 분발한다면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이룩한 역사적 장거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은 이제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마라톤 한국의 영광을 재건하고 지속시킬 각오와 노력을 다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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