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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신의를 지키며…」-이란사태 팔레비의 시련(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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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는 이른 아침「지스카르-데스탱」(프랑스대통령)을 전화로 불러「호메이니」와 접촉하여 무슨 수를 쓰든지「호메이니」의 이란귀국을 늦추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협조하겠다고 답했다.「호메이니」의 프랑스출국을 저지할 길은 없지만 얼마쯤 늦출 수는 있으리라는 것이었다.「지스카르」는 또 프랑스정부는「박티아르」정부를 지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샤」의 미국방문계획은 잘못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는「샤」가 미국으로 가기 전에 얼마동안은 중립국에 머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의했다.
이날하오 늦게「지스카르」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호메이니」가 당분간은 파리를 떠나지 않을 계획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는「당분간」이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호메이니」가 이란으로 귀국한다면 생명을 잃게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주=「호메이니」는 그로부터 2주일후인 2월1일 귀국했다).「호메이니」의 최종목표는 「박티아르」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일기 1979년1월14일>
「호메이니」는 「샤」와 미국을 싸잡아 비난한 연설을 테이프에 녹음하여 이란으로 보내고 있었다.「호이저」장군을 통해 우리는 이란군부와「박티아르」와의 유대강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모로코·요르단 및 다른 몇몇 회교국가들에 대해 이란의 새 정부를 지지하고「호메이니」가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거들 것을 촉구했다.

<호옹 태도 잘 바꿔>
며칠 뒤 1백만 명이 넘는 이란군중들이「호메이니」지지집회를 열었다. 그는 파리에서 성명을 내 자신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으며 15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지체 없이 이란으로 귀국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박티아르」는「호메이니」가 그대로 파리에 머문다면 자신은 사임하고 국민의 의사에 따라 새 정부를 구성하도록 하겠다고 제의했다.
저녁때「자헤디」(워싱턴주재 이란대사) 가「브레진스키」에게「샤」는 미국으로 오지 않고 가족과 더불어 모로코에 머물기로 했으며 이는「샤」가「사다트」및「하산」모로코 왕과 협의한 후 결정한 것이라고 알려줬다.「브레진스키」는 다소 불안해했으나 나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샤」가 회교국가에 체류하는 것이「박티아르」에게 유리하며「하산」왕의 영향력으로「호메이니」를 자제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샤」가 미국으로 오지 않는 것이 우리나 그 자신을 위해서나 좋은 일로 생각된다.<일기 1979년1월20일>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옛 동맹 자를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라도「샤」를 미국에 오도록 하는 것이 나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샤」 일가가 이란을 일단 떠나긴 하지만 얼마 안 있다 귀국하겠다는 생각에서 먼 미국으로 와 본국과의 모든 관계를 거의 단절시키기보다는 가까운 회교국가에 머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샤」는 1월16일 휴가명목으로 테헤란을 떠났다. 그가 떠나버린 이란은 정부의 불안정, 군부의 지리멸렬,「호메이니」의 귀국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소요 등으로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박티아르」수상은「호메이니」가 귀국한다면 그룰 체포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우리에게 알려왔으나 곧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혼란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유혈사태가 더 이상 없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미 시민 철수시켜>
「호메이니」의 입국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공항이 폐쇄됐다. 대신「박티아르」는 자신이 파리로 그를 방문하겠다고 발표했다.「호메이니」의 보좌관들이 그의 방문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자「박티아르」는「호메이니」의 귀국을 허락했다. 그는 그런 조치가 질서를 회복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었다.「호메이니」는 언제나처럼 마지막 순간에 가서 태도를 번복해 파리에서「박티아르」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2월l일에 그는 테헤란공항에 도착, 수십만 지지군중의 환영을 받았다. 나는「호이저」장군의 신변을 염려하여 그를 철수시킬 것도 고려했지만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았으므로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했다.
이란군부지도자들도 그의 체류를 바랐는데다 그의 영향력과 보고내용은 워싱턴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매우 값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미국정부는 이란을 떠나기를 희망하는 많은 미국시민들을 철수시키느라 바빴다. 혼란이 시작된 후로 우리는 2만5천명 이상을 출국시켰지만 그래도 아직 1만여 명의 미국인이 남아 있었다.
「설리번」은 외교관을 제외한 모든 미국시민들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으므로 출국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정부는 계속해서 미국시민들을 철수시켰으나 그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동안 수백만 명의 이란인들이 시위에 참가했으며「호메이니」지지자들과 경찰의 충돌로 수천 명이 희생됐지만 기적적으로 미국인에 대한 습격은 전혀 없었다.
「호메이니」는「메흐디·바자르간」을 수상에 지명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박티아르」 는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군부지도자들은 사실상의 내란상태 속에서 중립을 지키겠노라고 선언했다.2월14일엔 소수의 좌파게릴라가 2시간동안 미국대사관을 포위했으나「호메이니」추종자들에 의해 해산됐다.
그 시점에 나는「호이저」장군을 귀국시켜 이란사태에 관해 직접 설명을 듣기로 했다. 그는 자신과「설리번」대사사이에 이란 정책에 관해 상당한 견해차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설리번」은「호메이니」가 민주적으로 통치할 것이므로 미국이 그의 정권인수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호이저」장군자신은 그렇게 될 경우 파국이 오고 말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얘기였다. 또「설리번」은 군부가 이란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되며 이에 초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호이저」는 새 헌법이 제정·발효될 때까지 군부가 기존 정부의 지지를 뚜렷이 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복 땐 사임하라〃>
「호이저」는 또 일부군부지도자들의 쿠데타기도를 단념시켰다고 보고했다.「호이저」의 보고와 이란주재대사의 말과 행동을 비교해보니 국무성이 나의 지시를 열성과 성의를 갖고 이행하기를 꺼려왔음이 명백해졌다.
「밴스」는「설리번」의 태도를 바꾸게 하든지 아니면 교체시킬 양으로 국무성의 차관급 관리 한사람을 이란에 파견했다. 나는 또 국무성의 이란과 관리들과 몇몇 관계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다. 당시 나를 골치아프게 한 사람은 비단「설리번」뿐만이 아니었다.
「샤」와 군부, 그리고「박티아르」를 지원해야 한다는 나의 판단에 반대하는 국무성 관리들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뉴스들이 워싱턴에서 잇달아 터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백악관으로 불러들인 관리들에게 대통령의 결정에 불복하는 경우 남은 길은 사임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나는 만약 또다시 국무성 관리들의 정보 누설로 보도가 나간다면 국무장관에게 해당자를 가려내 파면시키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대통령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든 가, 사직하든 가 하라고 거듭 말했다.
국무성과는 달리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NSC)나 국방성은 나와 견해차이가 없었다.<무단전재·출판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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