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의 시 「가을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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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가 고향의 목마른 황토 길을 그리워하듯이 /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 그대가 내게 오래오래 간직해준 / 그대의 어떤 순결스러움 때문 아니라 / 다만 그대 삶의 전체를 이루는, 아주 작은 그대의 몸짓 때문일 뿐 / 이제 초라히 부서져 내리는 늦가을 뜨락에서 / 나무들의 헐벗은 자세와 낙엽 구르는 소리와 /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세계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 내가 버리지 못하듯이 / 내 또한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 그대가 하찮게 여겼던 그대의 먼지, 상처, 그리고 그대의 생활 때문일 뿐 / 그대의 절망과 그대의 피와 / 어느 날 갑자기 그대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어져버리고 / 그대가 세상에게 빼앗긴 것이 또 그만큼 많음을 알아차린다 해도 / 그대는 내 앞에서 행여 / 몸둘바 몰라하지 말라 /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 그대의 치유될 수 없는 어떤 생애 때문일 뿐 / 그대의 진귀함 때문은 아닐지니/ 우리가 다만 업수임 받고 갈가리 찢겨진 /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듯이 / 조국의 사지를 사랑하듯이 / 내가 그대의 몸 한 부분, 사랑 받을 수 없는 곳까지 / 사랑하는 것은.

<낡고 소멸되는데서 의미 찾아>
이 달의 시 중에는 김정환씨의『가을에』(시집「지울 수 없는 노래」중), 이하석씨의『엘리베이터로 내려가다』(동인시집「자유시」), 민영씨의「내가 너만한 아이였을 때』(한국문학), 정규화씨의 『울면서』(동인시집「자유시」), 등이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김정환씨의 『가을에』는 꿈보다는 현실 속에서, 순결하고 완전한 것보다는 낡아가고 소멸되어 가는 것에서 오히려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사람과 사람의「만남」이 밑바닥에 깔려있는 이 시는 사람사이의 만남이 서로가 상실하는 과정이며 일상으로 젖어드는 것이지만 그 일상 속에서 절망하고 피를 끓임으로써 서로간에 긴장을 이루어 더 큰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강조한다.
「내 또한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 그대가 하찮게 여겼던 그대의 먼지, 상처, 그리고 그대의 생활 때문일 뿐 / 그대의 절망과 그대의 피와」라는 귀절과 「우리가 다만 업수임받고 갈가리 찢겨진 /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듯이」등에서 보여주는 것은 냄새나는 것, 썩어가는 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슬픔의 앙칼진 목소리」 로 더욱 절실히 나타남을 시인이 믿고 있다는 것이다.
◆하석씨의『엘리베이터로 내려가다』는 성적타락을 통해서 우리사회의 윤리부재를 드러낸 작품이다. 한 젊은 여자가 술을 마시고 한 남자와 동침하고 아침에 혼자 호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그려낸 이 시는「그녀는 휘파람을 분다」「그녀는 스커트만 조금 구겨졌을 뿐」「힐끗 십일층을 한번 올려다 봤을 뿐」등의 표현을 통해 한 타락의 전형을 보여준다. 엘리베이터가 기계문명과 산업사회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문명과 사회 속에 성적타락만이 아닌 보다 큰 타락이 번져가고 있음도 암시된다. 이 시는 도입부가 강력하고 스토리가 있으며 잘 읽혀 내려가도록 쓰여졌다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민영씨의 『내가 너 만한 아이였을 때』는 한 허약한 어린이를 통해 약자가 느끼는 비애, 약한자의 존립하는 방식을 밝혀준다. 제3세계문학의 한 면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구호적인 종지형이 다소 부담스럽다는 평. 정규화씨의『울면서』는 소외된 농촌적 삶의 아픔을 느끼는 시다.

<도움말 주신분="보남종·" 윤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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