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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풍자가 필요 없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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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런던특파원

자주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영국 BBC방송의 ‘해브 아이 갓 뉴스 포 유(Have I got news for you·네게 전해 줄 뉴스가 있어)’입니다. 다섯 명의 패널이 그 주에 벌어진 일을 두고 얘기합니다. 1990년부터 방영했다는 전통의 풍자 프로그램입니다.

 최근엔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소재가 됐습니다. 연하장으로 쓴 부부 사진을 두고섭니다. 부인인 셰리 블레어가 오른손을 블레어 전 총리의 가슴에 얹고 있고 블레어 전 총리는 뭔가 말하려는 듯한 표정입니다. 출연자들의 대화입니다.

 “트위터에서 사진을 두고 말이 많더라. 그중 하나가 셰리가 왼손으론 블레어 전 총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포토샵을 한 사진 아니겠느냐. 원래 다른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일 수 있다. 웬디 덩.”

 웬디 덩은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의 전 부인입니다. 두 사람이 14년 만에 이혼했는데 덩과 블레어 전 총리의 밀회 때문이란 설이 돌았지요. 질세라 한 패널이 말을 이어 갑니다.

 “따지고 보면 참 가슴 아프다. 셰리가 손을 올린 데가 한때 블레어 전 총리의 심장이 있던 데 아니냐.”

 심장조차 없는 사람이란 비아냥입니다. 블레어 전 총리는 그만큼 인기가 없습니다. 총리 때 이라크 참전 결정 못지않게 총리 이후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행보가 논란이 되고 있지요.

 패널들은 한 환자가 카리스마 결핍증이란 진단을 받았다는 얘기도 합니다. 바로 노동당 당수인 에드 밀리밴드입니다.

 역시 BBC 프로그램인 ‘러셀 하워드의 굿 뉴스’에서도 이런 문답이 오갑니다. “데이비드 캐머런(영국 총리)이 보톡스를 맞는다고 보느냐.” “당연히.”

 학창 시절과 군대·연애만 코미디의 소재가 되는, 혹은 돼야 하는 나라 출신이어선지 이 같은 정치 풍자에 깜짝 놀라곤 합니다. 영국에선 그런데도 미흡하다고 한탄합니다. “우리 시대엔 ‘스피팅 이미지(spitting Image·빼닮음)’가 없느냐”(언론인 제러미 팩스먼)는 거지요. 스피팅 이미지는 82년부터 12년간 방영된 정치 풍자 프로그램으로 유명인들을 빼닮은 인형이 등장했습니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폭력적인 독재자인 데다 남성용 소변기를 이용하는 이성(異性) 복장을 한 사람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반쯤 실성했고 쓰레기통에서 옷을 꺼내 입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수위가 만만치 않지요.

 영국인이 풍자를 중시하는 건 권력의 불합리한 면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긴장하게 하는 거지요. 한 칼럼니스트는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 풍자가 필요하다”고 썼습니다.

 우린 권력 스스로 불합리한 면을 드러내곤 합니다. 주기적으로요. 근래엔 자신의 비서가 만든 문서를 두고 “찌라시”라고 한 일이 있지요. 풍자를 대신하는 권력을 만들어 내곤 하는 우리가 더 진화한 민주주의일까요.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