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없는 슬픔 이기렴" 엄마와 함께 씩씩한 행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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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군 도중에 아들 재오가 발이 아프다고 하자 어머니 안기향씨가 발을 주무르고 있다.

▶ 14일 수원에 도착한 안씨 가족 3명이 포즈를 취했다.

"너희들이 씩씩하게 걷는 모습을 보니 엄마는 하늘에 계신 아빠에게 떳떳이 말할 수 있겠다. '여보, 아이들 잘 키웠지'라고-."

충남 천안에서 꽃가게를 운영하는 안기향(43)씨는 여름방학 동안 중학생 아들.딸과 함께 서울 여의도 63빌딩까지 2박3일 동안 100km를 걸었다.

"11년 전 큰아이가 네 살 때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아빠 몫까지 다하리라는 각오를 다졌어요. 도보 행군은 아이들에게 강인함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씨가 아이들에게 도보 행군을 제안한 것은 지난달 말. 딸 신민주(15.천안여중3)양과 아들 재오(13.천성중1)군도 흔쾌히 응했다. 엄마와 매주 등산을 한 재오는 체력에 문제가 없었지만 민주가 걱정이었다.

이들은 집 근처 초등학교에서 '행군 훈련'을 시작했다. 매일 오후 9시부터 한 시간씩 보름 동안 운동장을 돌았다. 장거리 도보를 위한 준비물도 챙겼다. 안씨는 서울을 자주 오가는 친구에게 구간별 거리를 재 주도록 부탁했다. 행군 일정을 잡기 위해서다.

민주는 "밤길 걸을 때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며 배낭에 붙일 야광 테이프를 구했고, 재오는 "이정표를 멀리서도 봐야 한다"며 망원경을 준비했다. 13일 오전 5시 이들은 한낮 더위를 피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이웃들이 잠에서 깨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국도 1호선을 따라 걷는 내내 보도가 너무 좁아 안씨는 아이들 안전에 더 신경써야 했다.

쏟아지는 땡볕 속에 10km쯤 걷자 아이들이 주저앉기 시작했다. 안씨도 힘들었지만 아이들을 일으켜 세웠다. 결국 첫날 수원까지 가려던 계획을 접고 40여km 지점인 송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민주는 양쪽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고 재오는 발목이 아프다고 했다.

재오와 민주는 서로 물집을 따주고 발목에 압박붕대를 감아줬다. 그후 집에서 매일 다투던 두 아이들은 서로 배낭을 매주는 등 형제애를 보였다. 민주는 걷던 중 "엄마가 우리를 아빠 없이 혼자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했다"고 말해 안씨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마지막 날인 15일엔 수원에 사는 친구 집에서 오전 2시 길을 나섰다. 안씨의 친구는 아이들이 더위 먹을지 모른다며 인삼 달인 물을 챙겨줬다. 수원 지지대 고개 부근에 이르자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근처 공원에서 비를 피하다 3명이 함께 잠에 곯아떨어지기도 했다.

민주는 "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며 "친구들이 격려 문자 메시지를 보내줘 힘든 줄 몰랐다"고 했다. 재오는 "이 세상에서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걷는 도중 만나는 사람마다 아빠가 없는 것에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당당히 답했다. 안씨가 "가장 걱정스러워 했던 부분에 의연히 대처해 대견스러웠다"고 했다. 서울까지 자랑스러운 도보 행군을 끝내고 안씨는 여고동창회 홈페이지에 수기를 올리자 동창들의 격려 댓글이 잇따랐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가족이다. 네가 우리 동창이라는 게 눈물이 날 정도로 자랑스럽다"는 내용이다. 안씨 가족은 내년 여름방학 땐 서울에서 임진각까지 걷기로 약속했다.

천안=조한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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