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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노동계, 국제 망신 자초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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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부의 노사정책 방향을 둘러싸고 노정 간의 갈등이 국제적 망신을 자초하는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12일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10월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노동기구(ILO) 아태지역 총회에 불참을 선언하고 ILO에 개최지 변경을 요청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총회가 예정대로 개최된다면 다른 나라 노동단체들에 불참토록 요청하고 총회 개최장소 앞에서 항의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ILO에서는 유엔 산하 다른 국제기구와 달리 정부.노동계.경영계 삼자가 축이 되어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또 이번에 열리는 아태지역 총회는 우리나라 정부와 ILO 사무국이 공동 주최를 하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총회의 개최지가 변경되거나 개최 시기가 연기될 가능성이 있다.

노동계가 자국에서 개최되는 국제회의에 불참하고 개최지 변경을 요구하는 것은 행사 주체인 정부의 입장을 어렵게 함으로써 노.정 간의 갈등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전략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자신들이 유치를 적극 지지한 국제회의를 자신들만의 이해 증진을 위해 방해하는 처사는 결코 호응을 얻기 어렵다. 우리나라 노동계가 자신들의 위치에 걸맞은 책임 있는 역할을 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가 1991년 ILO에 가입한 이후 노동계는 우리 정부의 노동기본권 침해를 ILO에 지속적으로 제기하여 우리 정부에 노동기본권의 개선을 권고하는 ILO 이사회의 결정을 이끌어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바 있다. ILO 이사회의 노동기본권 개선 권고 결정이 우리나라 정부의 노동정책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우리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노동기본권을 적기에 보장하지 못해 이와 같은 상황을 자초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부 문제를 외부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는 노조의 전략은 우리나라 대외 이미지와 국익에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ILO를 포함한 국제기구는 선진국이 주도하는 조직체다. 이러한 국제기구에서 우리끼리 국내 문제를 둘러싸고 집안싸움을 벌이는 것은 결과적으로 선진국과 경쟁 상대국에 우리의 입지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호재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40여 년간의 고도 경제성장으로 극도의 경계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세계의 노동자는 하나라고 노동계는 외치고 있지만 글로벌 시대의 국제경쟁에서 일자리 창출을 둘러싼 국가 간의 경쟁은 치열하며, 해외자본 유치에 노동계가 정부와 함께 노력하는 것이 다른 나라의 상황이다.

공무원 노조가 인정되면서 우리나라도 국제사회에 요구되는 노동기본권의 골격은 모두 갖추게 되었다. 또 우리나라 노동계는 10%가 조금 넘는 노조 조직률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노동운동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런 만큼 이제 국제사회의 여론을 조성해 국내 문제에서 자신들의 입장 강화를 도모하는 전략은 지양해야 한다.

노동계는 아시아나항공 조종사 노조의 파업에 대해 정부가 긴급조정권을 발동한 것을 ILO 총회 불참의 이유로 들고 있다. 필자도 긴급조정권 발동에는 찬성하지 않는 입장이지만 정부가 아시아나 파업에 긴급조정을 결정한 것은 국민의 대표자로서 정부의 고유권한을 행사한 것으로 봐야 한다. 더구나 긴급조정의 내용이 무엇인지 등 향후 추이를 지켜봐야 할 상황인데 긴급조정권 발동 자체만을 문제 삼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결론적으로, ILO 아태지역 총회 불참을 선언하고 이의 연기를 요청한 노동계의 결정은 정당성이 결여된 것이고 국익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동계는 우리나라 전체를 생각하여 ILO 총회가 예정대로 열릴 수 있도록 협조하고 총회의 장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개진하여야 한다.

박영범 한성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