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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국제행사 판깨는 노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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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철근 정책사회부 기자

"노동계가 이번 국제노동기구(ILO)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권리이자 의무다. (노동계가) 불참해 회의가 제대로 열리지 못하면 정부나 ILO는 물론 일반 근로자에게도 피해가 돌아갈 것이다."

정병석 노동부 차관은 23일 ILO 본부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로 출국하기 전 이렇게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정 차관이 갑자기 출국한 것은 노동계가 오는 10월 부산에서 열리는 ILO 아시아.태평양지역 총회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ILO에 '예정대로 총회를 열어야 한다'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설명할 예정이다. 이미 제네바에 가 있는 노동계 대표도 만날 계획이다.

노동계는 ILO 총회에 불참하고 개최지 변경을 요구하며 "집안이 콩가루인데 손님을 초청했다가는 더 큰 망신을 초래한다"는 이유를 달았다. 아시아나항공 조종사노조 파업에 긴급조정권을 발동하는 등 정부가 노동계를 탄압하는 상황에서 노동계가 손님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이다.

ILO는 이런 한국 노동계를 곱지 않게 보고 있다. ILO는 그동안 한국 노동계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런 ILO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에 22일 서한을 보내 강력한 유감을 표시한 것은 이번 사태를 그만큼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ILO는 노사정 3자가 참여해 노동문제에 대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논의하는 국제기구다. 조직 성격상 정부나 사용자 중 어느 한 편을 들 수 없게 돼 있다. 그럼에도 ILO는 노동계 입장에서 한국 정부의 노동법과 노동정책의 문제점을 자주 지적해왔다. 노동계는 ILO가 태도를 바꾼 이유를 되새겨야 한다.

이번 ILO 총회 한국 개최가 무산된다면 한국 정부뿐 아니라 노동계 입장에서도 국제적인 망신이다. 자신들이 동의하고 함께 준비한 행사를 스스로 깨버리는 한국 노동계를 국제사회는 과격하고 비합리적인 집단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노동계의 무리한 판 깨기는 결국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게 되고 그 피해는 한국 노동자들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 있다.

정철근 정책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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