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와 남] "묵향 번지는 새벽은 나만의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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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칠순을 맞은 선학회(仙鶴會) 회원 윤태순(서울 서초동)씨의 기상 시간은 오전 2시다. 만물이 고요히 잠든 시각. 혹 가족들이 깰까봐 윤씨는 조용히 부엌으로 발길을 옮긴다.

집안 구석구석을 걸레질하고 식구들 아침 식사를 준비하다 보면 어느덧 오전 4시30분. 일손을 멈춘 윤씨는 스스로 '나의 방'이라 이름 붙인 작은 방으로 들어가 정좌한 뒤 마음을 가다듬고 먹을 갈기 시작한다. 은은한 묵향이 방 전체를 서서히 채워가고 마디 굵은 윤씨의 거친 손이 붓을 잡는다.

이때부터 두시간 동안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윤씨만의 시간. 20여년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해 온 이 작업은 올해로 24회째를 맞은 선학회의 전시회 역사 속에 온전히 담겨 있다.

선학회는 40대 이후 중.노년 주부로서 그림.서예.자수 등에 매진해온 아마추어 예술가 어머니들의 모임이다. 전국의 문화센터가 제공하는 각종 강좌에 수많은 주부가 넘쳐나는 것을 보면 새삼스러울 게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20년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전시회를 개최하고 수준 또한 국전 등 각종 공모전에서 굵직굵직한 상을 거머쥐었다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게다가 프랑스.일본.몽골 등 해외 전시도 네차례나 했다.

이를 통해 국외 한인회관 건립이나 외국대학 내 한국 홍보관 건립에도 돈을 보탰다. 이렇게 공익에 기여해 왔다는 대목도 여느 동호회와는 다른 점이다. 하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자부심은 다른 데 있다.

"선학회의 자랑은 꾸준한 전시회도, 프로 수준의 작품성도 아닙니다. 남들이 잡담하고 놀거나 사치 부릴 때 돈과 시간을 아껴 작품을 해온 회원들의 마음가짐입니다. "

1999년부터 선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홍영희(70)씨는 윤씨와 같은 남다른 노력이 만 20년간 선학회를 이끌어 온 힘이라고 말한다.

선학회는 83년 창립됐다. 여성단체인 주부클럽연합회가 주최한 예능대회에서 입상한 이들이 주축이 됐다. 연령대는 40대 중.후반부터 70대까지. 15명의 회원으로 출발했다.

어느덧 초창기 회원들은 손자를 여럿 둔 할머니가 됐다. 작고한 사람도 생겼다. 그러나 회원은 고작 두배 남짓밖에 불어나지 않았다. 혹 폐쇄적 모임이 아닐까? 이유는 "대부분 신입회원들이 나가떨어졌기 때문"이란다. 매년 여는 전시회와 곁눈 한번 팔지 않는 강도 높은 회원 활동을 배겨 낼 수 없었던 탓이다.

"주변에서 우리 나이를 알고 나면 매우 놀라요. 얼굴이 너무 젊다는 거예요. 그래서 팔자 좋고 걱정 없는 주부들 모임쯤으로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

지난 4월 30일~5월 6일엔 서울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제24회 전시회가 열렸다. 여기서 만난 회원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젊음이 넘쳐났다. 하지만 드문드문 힘줄이 불거지거나 마디 굵은 거친 손이 이들의 삶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파출부 한번 쓰지 않고 매니큐어라곤 발라본 적이 없단다. 어느 회원은 집안 일 돌보고 작품에 몰입하는 두가지 일에 과로를 거듭해 눈에서 피가 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가사를 하면서도 오늘은 뭘 그릴까 생각하면 갈등을 느끼거나 고민할 겨를이 없어요. 집안일도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적절한 긴장이나 스트레스는 약이 되지요. "

총무를 맡고 있는 김경희(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씨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선학회의 모토는 '공부하는 어머니,생각하는 아내,노력하는 나'이다. 모임의 창시자로서 이제는 고인이 된 주영숙 할머니가 주창한 이념이다.

"회원들 대부분이 40대 중반에 새 출발을 한 셈이죠. 그림이나 서예 전공자는 아무도 없어요. 애들이 웬만큼 크고 난 뒤라 내가 좋아하는 일도 하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해 용기를 내 본 것이지요." 한문서예를 하는 권영길(60.경기도 용인시 수지읍)씨는 회원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밤새는 줄 모를 만큼 열심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정진하는 모습은 지금도 여전하다. 대부분의 회원은 매주 한차례 각자 스승을 찾아 더 깊은 예술의 세계를 위해 기량을 닦고 있다.

중년 이후를 선학회와 함께 해온 회원들은 이제 인생을 정리할 나이가 되니 자랑할 것도 좀 생겼단다. 김희숙.홍재옥.이숙영 회원 등은 칠순 기념으로 작은 전시회를 열었다. 이숙영 회원은 그림만으로 성에 안 차 수필집을 내기도 했다. 손자들에게는 그림 그리는 멋있는 할머니, 아들 딸들에게는 '보증수표'로 인정받는 '아름다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가사노동만 하기에도 벅차고 자녀교육 뒷바라지도 예전같지 않은 요즘, 선학회 회원들이 자칫 수퍼우먼처럼 비춰질 수 있다.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지는 않는지 물어봤다.

"맞아요. 젊은이들은 우리처럼 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 식대로 열심히 소박하게 살아왔습니다. 영리한 신세대에게는 그들만의 방식이 있을겁니다. "

역시 멋쟁이 어머니들의 멋진 대답이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사진설명>
선학회의 24회 전시회가 열린 서울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이숙영씨(맨 왼쪽)가 회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경기도 양수리를 배경으로 한 동양화다. 이숙영씨 다음으로 왼쪽부터 정태순.김시인.권영길.윤태순.김경희.홍영희씨. [임현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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