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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서 망명한 인사들-서방 정착에 어려움 많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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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중공·소련·폴란드 등 공산 국가로부터 자유 세계로 망명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고 있을까. 최근 이들 나라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는 망명 사건을 계기로 망명자들의 생활 정착 과정을 추적해본다. 공산 블록에서 탈출한 사람들에게는 대문짝 만한 신문 보도와 함께 명성과 행운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누구나 다 「솔제니친」이나 「바리시니코프」(발레 슈퍼스타)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망명자들은 일반 사회로 동화되지만 적응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두고 온 가족들 생각에 뼈저린 외로움을 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소련의 정치 장교 「세르게이·자마스치코프」 (31)는 기독교 구원 단체의 도움으로 미국에 정치적 망명처를 얻었지만 서방 세계에 첫발을 디딘 그의 앞날은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었다. 돈이 없어 이탈리아의 난민촌에서 4개월이나 썩어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박사 공부를 시작한 그는 『내가 택한 길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며 창창한 미래를 멋있게 설계해 보겠다』고 자신에 넘쳐 있다. 그는 이를 위해 소련군 대령의 아들인 자신에게 주어졌던 전략 미사일 분야 등의 보안 담당 정치 장교직과 함께 아파트·별장·운전사가 달린 승용차 등도 버리고 빈털터리로 미국에 건너갔다.
그는 3년전 소련 관리들과 단체로 이탈리아에 갔을 때 밀라노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 망명을 요청했으나 여권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여권은 인솔 책임자가 함께 보관했던 것. 이탈리아 시골 경찰은 그의 망명 요청을 알아듣지도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난민촌으로 숨어 들어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자신의 서류를 만들기까지 4개월이나 이곳에서 보냈다.
미국에서도 처음은 비참한 생활이 계속됐다. 일자리가 없어 시간당 5달러짜리 막노동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미국인 아내와 7살짜리 수양딸을 거느린 가장이 됐고, 2개 연구 그룹의 조언자 직책으로 수입도 많아졌다. 2년 동안 소식이 끊겼던 소련의 부모와도 연락을 할 수 있게 됐다.
74년 중공을 탈출한 「탐·창·셱」 (36)은 「먹을 것도 없고, 자유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중공에 살 수 없어 망명했다. 그는 지금 덴버시에서 중국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 그는 동네 청년 4명과 함께 산을 넘고 강을 헤엄쳐 2주간에 걸친 중공 탈출을 감행했으나 홍콩에 도착한 것은 그와 다른 1명뿐이었다.
78년 미국에 정착한 그는 이디오피아 교민과 결혼, 주방장 등으로 일하며 번 돈으로 종업원 7명의 음식점을 차렸고 빌딩도 갖고 있다.
동료 조종사 2명 및 그 가족들과 함께 지난봄 폴란드 공군기를 몰고 오스트리아로 탈출한「크르지스초프·바시에웨프스키」 (29)는 25세의 부인, 4살짜리 딸을 데리고 미국에 망명처를 얻었으나 폴란드에 두고 온 부모를 못내 아쉬워했다.
미국에서의 장래 또한 안정되어 있지 않다. 그는 요즘 매일 버스를 타고 뉴욕에 들러 민간 여객기 조종사가 되기 위한 자격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중. 가족 생계는 국제 구원 위원회의 도움으로 꾸려 간다. 그러나 그는 다른 조종사들이 하기 꺼리는 비행기로 살충제 뿌리는 일을 쉽게 얻을 수 있어 생활이 곧 나아지게 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5년 전만 해도 소련 예술 국장으로 공산권 문화계의 주요 인물이었던 「루디·아나폴스키」는 예술을 정치 선전에 악 이용하는 것에 염증을 느껴 예술계에 거물로 군림하던 자신의 직위를 박차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국에 온지 2년이 지나도록 적응을 하지 못해 경제학사인 부인 「나디아」는 경리 사원으로, 「루디」는 예술 국장이 아닌 바텐더로 일하고 있다.
이들은 소련으로 되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었으나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난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다. 「나디아」는 특히 10세 된 아들 「스탄리」가 러시아말을 할 때 남이 들을까봐 소근거리 듯 말하는 것을 들을 적마다 자신들이 태어난 땅에서 살지 못하는 슬픔에 잠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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