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비협조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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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편 과거 일본에서는 한반도와 대륙침략의 구실로서 1270∼80년대 원과 고려의 일본원정을 들먹이기도 하였다. 즉 원과 고려, 뒤에는 멸망된 남송의 군대까지 동원되어 일본을 공격하였으므로 옛날의 그 일을 복수하기 위해 한반도와 나아가서는 중국대륙까지도 침략하겠다는 것이었다. 정말 터무니없고 유치한 핑계였다.
그러나 정녕 원의 일본 원점이 지연되고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고려의 비협조와 한민족의 원에 대한 저항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오히려 고려와 한민족에게 큰은혜를 입은 셈이었다. 만약에 당시 해운과 해전에 정통한 고려에서 원의 일본 원정을 적극 도왔더라면 사태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 사실은 해방 뒤에 일본인 학자 기전외씨에 의해 학술적으로 밝혀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이러한 양심적인 자기나라 학자의 말에도 별로 귀를 기울이는 것같지 않다. 그들 민족의 역사적 무지와 편협성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편견과 잔꾀는 왜구를 보는 태도에서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왜구를 자기들의 교과서에서 무역활동과 관련시켜 서술하고 있다. 가령 삼성당에서 편 『일본사』 에서, 「고려와 중국으로 건너가 무역을 했는데 무역이 신통치 않을 때에는 자주 약탈을 했기 때문에 왜구라고 불리는 공포의 대상이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예 중의하나다.
우리나라에 왜구가 창궐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후기 부터였다. 당시 왜구로 인한 피해는 이루 헤아릴수 없었다.
당시의 사정을 전해주는 『고려사』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무척 많다. 가령 그 사례의 하나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380년(우왕6년) 8월에 대대적인 왜구의 노략질이 있었다. 그들은 5백여척의 배를 끌고와서 지금의 충청·전라·경상도지방을 노략질하였다.
민가를 약탈하고 불지르며,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을 죽이거나 붙잡아 간 수가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시체는 산과 들을 덮었으며, 약탈한 곡식을 그들의 배에 운반할때 땅에 떨어진 쌀이 자(척)높이 이상으로 쌓일 정도였다. 그리고 두세살난 어린 계집아이를 붙잡으면 머리털을 깎고 배를 갈라 물에 씻고는 쌀·술과 함께 제물로 삼아 하늘에 제사지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 이런 무역 활동도 있었던가. 아무리 제 논에 물대게 마련이요, 팔이 안으로 굽는다손 치더라도 이처럼 극악무도한 해적 짓을 자기나라 사람들이 했다고 해서 무역 운운하며 얼버무리면 어쩌자는 것인가. 아마도 인류의 해적사상 고려말의 왜구처럼 잔악한 해적을 또 달리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남의 나라 역사는 사실 이상으로 과장해서 헐뜯거나 아예 왜곡하고 제 나라에 관한 것이면 명백한 범죄마저도 두둔하고 은폐하려는 것이 그들이 역사를 대하는 기본적 태도였다.
우리는 고려의 대외관계 문제를 보는 관점의 차이에서도 새삼 일본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분명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일본, 그러나 그 일본은 아직도 진정한 이웃일수 없다. 먼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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