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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반성문' 에는 치열한 자기반성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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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2003년 5월 11일 뉴욕 타임스는 1면 톱기사로 자사 문제를 다뤘다. 제이슨 블레어 기자가 어떻게 인터뷰를 날조하고 타 매체의 기사를 훔쳤으며, 사진까지도 조작했는지를 조목조목 밝히는 기사였다. 리드는 "이 사건은 독자의 신뢰에 대한 엄청난 배신이며, 이 신문의 152년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말 불거진 X-파일 파문은 중앙일보를 어려운 처지에 빠뜨렸다. 녹음 내용 가운데 퇴임한 회장이 신문사 최고경영자의 위치에서 삼성그룹과 정치권의 부적절한 관계에 개입했다는 정황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여부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의구심만으로도 신문의 존재 이유를 부정할 수 있는 사안이다.

중앙일보는 7월 25일 1면 톱기사 자리에 "뼈를 깎는 자기 반성"을 다짐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이 글은 1997년 이후 중앙일보가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지난해에는 제2창간 10주년을 맞아 다시 과거를 반성하고 불편부당의 자세를 다짐했다고 강조했다.

8월 5일에는 기자 전체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국민과 독자에게 사죄하는 글을 2면에 실었다. 이 글에서 기자들은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삼성과 정치권의 부적절한 관계에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개입한 것은 언론사 책임자로서 있을 수 없는 처사"였다고 밝혔다. 또 "중앙일보가 삼성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니냐"는 국민의 의혹을 충분히 인식하고 "과거의 부적절한 관행이 남아있다면 이를 과감히 끊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중앙일보의 반성문은 신속했다. 내용도 포괄적이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의 반성 방식과는 두 가지 면에서 달랐다. 첫째는 기사의 양식이다. 뉴욕 타임스의 기사는 사설이나 의견이 아니다. 문제가 무엇인가를 육하원칙에 따라 조목조목 밝히는 사실보도 형식을 취했다. 그러다 보니 길이도 길어서 1면에서 시작한 기사가 뒤로 넘어가 신문의 3개 면가량을 차지했다. 스스로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는 작업이 치열하게 추진됐고 그 내용을 모두 공개했다는 뜻이다.

둘째 차이는 잘못을 어떻게 제도적으로 수정해 가는가에서 관찰된다. 뉴욕 타임스는 블레어 사건 이후 앨런 시걸 부국장을 중심으로 제도개선위원회를 구성해 2003년 7월 30일 "왜 우리의 저널리즘은 실패했나"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놨다. 주요 내용에는 퍼블릭에디터 제도 도입과 윤리담당에디터의 신설, 익명 취재원 처리에 관한 기준을 강화하는 취재준칙의 채택 등이 포함돼 있다.

신문은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직업이다. 이윤보다는 명예가 중요하고 독자의 신뢰가 상실되면 시장도 사라지는 특성이 있다. 뉴욕 타임스가 치욕을 무릅쓰고 잘못된 부분을 드러내는 일이나 정예인력을 동원해 취재보도 관행을 개선하는 이유는 모두 상실된 신뢰를 되찾으려는 최선의 노력이다. 중앙일보 역시 우수한 기자들이 모여 있는 한국 최고의 신문 가운데 하나다. 이번 파문을 계기로 자신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신문의 도덕성을 최고로 끌어올릴 수 있는 위기극복 방식을 모색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