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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우리 민족끼리" 어디로 가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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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한'이 밀물처럼 밀려와 실로 파격적인 행보로 많은 사람의 심장에 깊은 인상을 남겨놓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들이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참배하고, 국회를 방문하고, 경주에서 '신라의 달밤'을 합창하는 모습은 지평선 저쪽 초현실(Surreal)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 같았다. 그들이 한국을 따돌리고 미국하고만 협상하려던 통미봉남(通美封南)의 그 사람들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것은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의 재판 같았다.

민족을 앞세우면 분위기는 과열된다. 한이 많은 민족일수록 더욱 그렇다. 남북 노동자 대표들의 모임에서 남한 대표들 주도로 회의장 분위기가 남북 노동자들의 단합된 힘으로 통일 방해세력인 미군을 몰아내자는 쪽으로 흐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치면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민족 대축전에 참가한 사람들은 우리 민족끼리 핵전쟁의 위협을 제거하고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 외쳤다. 그러나 과열된 축전의 슬로건으로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한반도 주변 국제정치의 조건은 민족이 승(勝)하면 통일은 그만큼 멀어진다는 현실을 말해준다. 한국의 민족 대축전에 미국과 일본이 주목하는 것은 당연했다. 미국과 일본이 남북한의 과도한 민족공조에 의혹을 가지면 6자회담에서 한국의 입지는 궁색해진다. 뉴욕 타임스의 보도에 벌써 그런 의혹이 묻어난다.

북한 대표들의 놀라운 행보의 배경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다. 북한이 진정으로 변하고 있는 증거라는 해석에서부터 남한의 여론을 휘어잡아 노무현 정부로 하여금 6자회담에서 북한 입장을 지지하고 경제지원을 더 받아내기 위한 평화공세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그러나 동기야 어떻든 그들이 국립현충원을 참배하고 국회를 방문하고 경주에서 '신라의 달밤'을 부른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토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민족 대축전이 편협하고 배타적인 민족의 카니발에 그치지 않고 한반도 문제의 포괄적인 해결에 필수적인 남북 화해와 협력의 큰 걸음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북핵과 평화협정을 포함한 한반도 문제는 동북아시아의 국제문제다. 핵 위기가 해결되지 않고 악화되는 경우를 가정해 보면 "우리 민족끼리"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다. 북핵 문제가 유엔 안보리 상정이나 북한 봉쇄와 경제제재의 확대.강화로 악화되면 한국과 미국이 갈등을 빚고, 개성공단과 금강산.백두산 관광사업을 포함한 남북관계에 제동이 걸릴 것이다. 그럴 경우 북한이 부릴 히스테릭한 반응은 다시 한반도에 위기를 몰고 올 것이다.

민족 대축전이 끝난 다음날 시작된 중국과 러시아의 합동 기동훈련도 한반도 문제가 동북아시아 문제라는 엄혹한 현실을 일깨워 준다. 한반도의 앞뒤에서 진행되는 중.러 기동훈련의 장기적인 목적은 아마도 미국과 일본의 연합세력에 의한 동북아시아 패권 장악을 저지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기적인 실천목표는 중국과 러시아가 한반도에 직접적인 이해와 발언권이 있음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두 나라는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미국 주도도 싫고 남북한 "민족끼리"의 해결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끼리"가 반미.반일 통일전선으로 비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 외세의 배제를 말하려면 일반론으로 하라. 중국과 러시아도 미국과 일본 못지않은 외세다. 일부 대표가 이성의 한계를 넘어 민족 과잉으로 흐른 것은 민족 대축전의 옥에 티다. 개탄스러운 일이지만 한반도 문제는 국제정치의 조건을 떠나 우리끼리는 해결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도 동북아 정세를 언급했어야 옳다.

"우리 민족끼리"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주도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전제조건인 한반도의 평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쓰기에 따라 약도 되고 독도 되는 '민족'은 두 차례의 축전에서 대립과 갈등보다는 화해와 협력이 낫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제는 민족을 넘어 동북아시아와 세계를 볼 때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