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2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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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콜타르를 바른 루핑 지붕 위에 눌러놓은 돌들이 보이고, 환기구멍 겸 창문 대신 뚫어놓은 연두색 플라스틱 슬레이트가 하늘을 향해 치켜져 있는 게 보일 만큼 집들이 주저앉아 있었다. 골목을 빠져나가면 동네의 유일한 펌프가 있었고, 옛날 버릇대로 유휴지의 이곳저곳에 제각기 일구어 놓은 채소밭이 있었다. 파, 옥수수, 배추 등속이 자라나 있었다. 벌이를 나갔던 사람들이 대부분 돌아와서 이미 세수를 하고 발도 씻고서는 파자마나 반바지 차림으로 빈터의 곳곳에서 바람을 쐬는 중이었다. 이제 오나, 어 그래, 하는 것으로 대충 인사말을 건넸다.

포장마차 강씨는 내가 일자리와 거처를 구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대뜸 자기네 집에 방 한 칸이 남는데 월세로 들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이 포장마차에 여러 공장의 작업반장이 들르는데 그중에서 누구든 골라잡아 취직 부탁을 할 수 있다고 그랬다. 나는 우선 그의 집에 가보기로 하고 통금 시간이 다 되어 그들 부부를 거들어 함께 포장마차의 뒤처리를 해놓고 판자촌 동네로 따라가 보았다. 강씨가 빈 함지나 바케츠 술병 등속을 자전거에 싣고 천천히 페달을 저으며 갔고 그의 아내는 팔다 남은 것들을 스티로폼 박스와 얼음에 채워 함지에 넣어 머리에 이고 따랐고 나도 양손에 국물이 가득 든 들통이며 양념병과 남은 음식물 보퉁이를 들었다.

우리가 공단 구역의 담을 따라서 걷다가 휘청대는 철판 몇 장을 겹쳐놓은 가교를 건너자 어둠 속에서 희미한 불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캄캄한 유휴지 너머로 불빛들이 몇 점씩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전쟁 직후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는데 어둠에 익숙해지자 담뱃불의 움직임이며 웅성대는 얘깃소리와 아이들의 칭얼대는 소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네모난 창문 가운데 따뜻하게 너울대고 있는 촛불 빛이 아련한 추억을 떠오르게 했다. 그야말로 피난 시절의 동네였다. 강씨네 집은 공터를 향하여 지은 첫 번째 집이어서 다른 데보다 형편이 나았다. 바람이 잘 통했고 그의 아내가 파와 상추 등속의 푸성귀를 집 앞 공터에 독점적으로 심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툇마루도 내달지 않은 채로 창호지를 바른 격자 창문이 그대로 현관이자 출입구였던 셈인데 바깥 공기가 제법 싸늘했는데도 그의 아들 근호가 문을 열어둔 채로 부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인기척이 들리자 창문 아래 벗어 두었던 신을 꿰며 밖으로 나왔다.

- 이제들 오세요?

나는 그 집에서 한 달 가까이 지내면서 근호와 친하게 되었다. 그는 스무 살이었고 중학교를 중퇴했다. 어머니가 강씨와 결혼하기 전에는 고아원에 맡겨져 있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마찌꼬바 정도의 철공소에 다니면서 견습 선반공이 되었고 지금은 기능공이다. 뚜렷한 직장이 있는 그는 어머니의 자랑이고 강씨도 그를 어느 정도는 존중해 주고 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먼저 어머니의 머리에서 짐을 내리고 방 옆에 달린 부엌 문을 열고는 함지 등속을 거치적거리지 않는 부엌 안쪽에 정리해 둔다. 그리고 아버지의 짐도 자전거에서 내려다 부엌에 들여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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