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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빈 암자 佛心까지 詩에 녹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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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남들 출근할 때/섬진강 청둥오리 떼와 더불어/물수제비를 날린다/남들 머리 싸매고 일할 때/낮잠을 자다 지겨우면/선유동 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한다/(중략)/일하는 것이 곧 죄일 때/그저 노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가/스스로 위로하며 치하하며/섬진강 산 그림자 위로/다시 물수제비를 날린다/이미 젖은 돌은 더 이상 젖지 않는다."('독거'중)

6년 전 대책 없이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독거(獨居)하고 있는 이원규(41)시인이 신작시집 '옛 애인의 집'(솔 발간)을 펴냈다. 고교 1학년 때 백화산 만덕사로 입산했던 이씨는 1980년 신군부가 일으킨 법난으로 포승줄에 묶여 하산해야 했다.

84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씨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실무를 맡으며 문단 심부름도 많이 했다. 직장도 갖고 가정도 꾸려나가다 98년 홀연 다시 입산해 이제 부처님 없이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구도하던 중 사월 초파일에 시집을 펴낸 것이다.

"밤마다/이 산 저 산/울음의 그네를 타는//소쩍새 한 마리//섬진강변 외딴집/백 살 먹은 먹감나무를 찾아왔다//저도 외롭긴 외로웠을 것이다"('동행'전문)

밤 홀로 듣는 소쩍새 울음처럼 외로운 심사가 세상에 또 있겠는가. 무심한 발걸음이 개미 등 미물을 밟아 살생할 수 있듯 직장 생활의 관행적 쳇바퀴에 다쳐 아픈 사람들도 있었을 게다. 해서 '노는 것이 정당하다 위로하며' 떠나온 일상이지만 이승은, 속세는 여전히 그립다.

그 그리움마저 훌쩍 뛰어넘을 깨친 세계는 아직 멀다. 아니 가장 인간적이어야 하는 시인, 그리고 젊기에 초월은 바라지도 않는다.

이 산 저 산에서 그네 타듯 들리는 소쩍새 울음마냥 차안과 피안, 이승과 저승을 시인은 함께 살아낼 수 밖에 없다. 그래 시인은 자신의 머무는 토굴을 '피아산방(彼我山房)'이라 부른다.

"무련,/너는 바람 한 점 없는/처마 끝의 풍경소리다/여전히 너는/따뜻한 손길 하나 없는 천수관음/물구나무 선 삼층석탑이다//무련,너를 찾아/회산 연꽃방죽에도 가봤지만/네가 없으니/마침내 나도 없다//없는 너를 찾아/공중분해의 내가 간다"('무련,너를 찾아 나는 간다'중)

무련(無蓮)은 이승에는 없는 연꽃이며 바람 없이도 울려야 하는 풍경이며 손 하나 없이도 천명의 시름을 건져줘야 하는 천수관음(千手觀音)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나 가르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접 달을 바라보며 그 요체를 깨닫는 직지인심( 直指人心)의 선(禪)이요,시인에게 있어서는 온 몸으로 밀고 나가며 깨달아야 비로소 얻어 남을 울릴 수 있는 시다.

이번 시집에는 이씨가 '더 정들면 못 떠난다'며 지리산 빈 집,빈 암자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자연과 더불어 온몸으로 깨달은 시 66편을 사진작가 이창수씨의 지리산 풍경과 함께 실었다.

시집을 읽은 실상사 주지 도법 스님은"근원적 물음 앞에 선 벌거벗은 한 인간의 고뇌가 가슴 저리게 했고,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끈끈한 정이 그리워졌다"고 했다.

쌍계사 화개 골짜기 십 리 벚꽃길이 그만이라고, 곡우 햇차가 나왔다며 철마다 다정다감하게 도회 문우들을 지리산으로 초대하곤 하는 이씨는 바야흐로 천렵철로 들어섰다며 지리산 섬진강 줄기 천렵놀이로 초대한다.

"꺽지 은어 빠가사리 버들치/ 목어(木魚)처럼 내장을 빼내어도/물고기들은 내내/묵언수행 중"('물고기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중)이라며 천렵놀이 매운탕으로 눈물도 없이 우는 법을 깨닫자 한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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