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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보다 가까운' 성희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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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민상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김민상
문화·스포츠·섹션 부문 기자

“야, 저게 여자라고 봐줬더니 말이야. 너, 네 남편한테 고맙다고 해라. 너 같은 여자랑 같이 살아주니깐.”

 마 부장의 입은 항상 주변에서 말썽을 일으킨다. 여직원들이 급기야 성희롱을 문제 삼고 들고 일어서자 “그게 왜 성희롱이야. 파인 옷 입고 온 그 여자가 잘못이지”라며 오히려 삿대질을 한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이다.

 본지는 국내 성희롱 첫 배상 판결 20년을 맞아 끊이지 않는 성희롱 사건의 현주소를 짚어봤다. <중앙일보 11월 29일자 토요판 1, 13, 18면>

기사가 나간 뒤 일부 남성들의 반응은 마 부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젠 아무 말도 못하겠다” “‘뚱땡아, 커피 타 와’라는 말이 성희롱이라면 남자가 여자한테 하는 말이 대부분 다 걸린다”는 불만이었다. 인터넷에도 “‘김 대리는 남자다워’ ‘어깨가 넓은 게 듬직해 보여’도 다 성희롱에 해당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수백 개의 댓글이 붙었다.

 여성들도 할 말이 많았다. 이들은 “우리나라는 아직도 성희롱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1면에 나온 기사 제목이) ‘이것도 성희롱’이 아니라 ‘이것은 성희롱’이라고 표현해야 정확하다”며 기사에 깔려 있을지 모를 ‘남성주의적’ 시각을 의심한다.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성희롱의 판단 기준이다. 여성가족부와 고용노동부는 성희롱을 판별하는 기준 중 하나인 ‘성적 굴욕감’이 행위자의 의도가 아닌 피해자의 관점에서 결정된다고 해석한다. “남성의 성희롱은 실수, 여성이 당한 성희롱은 행실 잘못”이라는 비뚤어진 인식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있는 데다 계층적인 직장 문화 탓에 피해자의 대다수인 여성은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 못하기 일쑤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피해자가) 느끼면 걸린다”는 기준은 성희롱을 막기 위한 최후 방어선인 셈이다.

 정부의 잣대는 법원의 최종 판결에 반영된 성희롱 기준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법원의 판단은 피해자의 관점을 보다 객관적으로 검증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법원 판단보다 다소 엄격해 보일 수 있는 여성가족부 등의 성희롱 잣대를 충분히 숙지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법원·여성가족부·고용노동부 등의 성희롱 잣대보다 더 중요한 건 내 여동생, 내 딸의 입장이 아닐까. 내 누이가, 내 딸이 회사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떨지 한번 곱씹어봤으면 한다. 그게 가장 현실적이면서 현명한 성희롱 잣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운전대를 잡은 당신은 사이드미러에 적힌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매일 볼 것이다. 그때마다 ‘성희롱이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다’는 경계를 늦추지 말았으면 한다.

김민상 문화·스포츠·섹션 부문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