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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노조시대] 제2부. <1> '뜨거운 감자' 비정규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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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식민지 시대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정규직은 일등 시민이고 우리 비정규직은 2등 시민이지요. 정규직들은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한 것보다 우리에게 더 못되게 하고 있습니다."

한 대기업 비정규직 근로자가 최근 털어놓은 불만이다. 그는 "비정규직 근로자들 대부분이 스스로를 '2등 노동자'라고 자조한다"고도 했다.

'2등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차별은 노동현장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흔히 노조는 사측의 탄압을 비난하지만 사내 비정규직들은 정규직들로 구성된 노조의 차별을 호소한다.

에어컨 메이커인 D사에서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해줄 것을 요구하자 정규직 근로자들이 '구사대'로 나섰다. 이들은 집단행동을 하려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강제 해산하는 등 물리적 충돌을 빚기도 했다.

두산중공업의 경우 한 울타리 내에서 근무하는 하청업체 직원 등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정규직의 식당이나 샤워장을 이용할 수 없다. 일은 같이 하면서도 밥도 따로 먹고 샤워도 따로 해야 한다.

통근버스가 텅텅 비어도 이들은 탈 수가 없다. 낮은 임금과 고용불안으로 비정규직이 겪는 차별에 비하면 사내 복지에서 받는 차별은 오히려 작은 문제다.

"정규직들은 임금이나 복리후생.근로조건에서 월등하게 유리합니다. 외주업체 직원들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50~70%의 임금을 받는 데다 근로조건이나 복리후생은 턱없이 열악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노조의 과격한 임금투쟁은 설득력이 약하지요. "(모 대기업 임원)

비정규직에 비하면 정규직과 그 노조는 일종의 특권층이라는 얘기다. 한 노동단체 관계자도 "정규직 노조는 자신의 일자리와 돈.기득권을 나눠주려는 연대의식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지난 1일 TV토론에 나온 노무현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했을 정도다.

"대기업 노조도 문제입니다. 실제 길거리로 나설 때는 비정규직 문제를 들고 나오지만 협상에서는 비정규직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했는지 양심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MBC-TV 100분 토론에서)

盧대통령의 눈에도 비정규직 차별은 '노노(勞勞)문제'로 비친 것이다.

최근 들어 노조는 눈에 띄게 비정규직 지원태세를 갖추고 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모두 지난 1일 근로자의 날을 맞아 비정규직 보호를 큰 이슈로 내세웠다.

그러나 개별사업장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증권.보험사 등의 사무직들로 구성된 사무금융노조는 보험설계사가 별도로 노조를 만들려고 하는 데 부정적이다.

금융노조는 올해 임단협에서 비정규직에 대해서도 정규직과 똑같은 11.4%의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기본적인 임금 격차는 그대로 두려는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 시중은행의 임원은 "동일 인상률 적용은 비정규직을 위해주는 척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조가 이런 식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풀려고 하자 사측에서는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전문가들도 "비정규직의 조직화를 통해 노조의 세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라는 해석에 무게를 두기도 한다.

이에 대해 새 정부는 어떤 입장인가. 노조의 요구에 따라 급하게 서두르다 보니 '동일노동, 동일임금'원칙을 들고 나왔다 거둬들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내놓은 대책은 ▶비정규직 차별금지 원칙의 명문화▶차별시정 전담기구 설치▶사용자의 비정규직 남용 규제방안 강구 등이다. 이를 통해 비정규직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가운데 '노노 문제'의 해결을 유도하는 내용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새 정부가 노동계 스스로 풀지 못한 문제를 경영계로 떠넘기려 한다는 지적을 듣고 있다.

사측은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기존의 노동관행을 그대로 둔 채 노동계의 요구나 새 정부의 구상대로 획일적인 비정규직 보호정책이 시행될 경우 기업 부담이 너무 커진다는 이유에서다. 인건비는 20% 정도 오르고, 이를 피하기 위한 기업들이 해고자를 양산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비정규직 보호가 정치적인 선택이 될지, 경제논리에 따른 정책이 될지 걱정입니다." 한 민간연구소 연구위원의 말에는 비정규직 보호와 관련한 노정(勞政)의 발빠른 행보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시각이 잘 나타나 있다.

◆다음회에는 '노조단체 키워주는 산별교섭'을 게재합니다.

***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김정수 전문기자 (경제연구소), 남윤호 .김기찬.하현옥 기자(이상 정책사회부).강병철 기자(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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