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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한복판 ‘차 없는 거리’ 사고 줄고 교통 빨라져 … 매장 임대료 오히려 상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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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009년 뉴욕 타임스스퀘어 인근 42~46번가의 차량 통행을 막고 조성한 ‘보행자 광장’의 모습. 6개월 만에 대형 점포 5곳이 문을 여는 등 상권이 살아났다. 뉴욕시 관계자는 “시민들이 걷는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걸 보고 성공을 직감했다”고 말했다. 현재 이곳은 영구적으로 보행 공간을 만들기 위해 공사 중이다. [중앙포토]

“선진화된 도시(Developed city)는 빈자(貧者)가 자가용을 이용하는 곳이 아니라 부자(富者)도 대중교통과 도보를 선호하는 곳이다.”

 세계 최대의 지식 콘퍼런스 TED에서 지난해 논의된 주요 주제 중 하나는 ‘메트로폴리스의 미래’였다. 콜롬비아 보고타 시장을 지낸 엔리케 페날로사는 TED에서 ‘선진 도시’의 정의를 다시 내렸다. 이러한 도시 개념의 변화를 가장 최근 증명한 곳이 ‘자동차 천국’ 미국의 뉴욕이다.

 2009년 자넷 사딕칸 뉴욕시 도시국장은 “보행로의 부족이 뉴욕을 망치고 있다”며 “타임스스퀘어 도로를 막고 ‘차 없는 도로’를 시범 운영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가장 혼잡한 타임스스퀘어를 6개월간 막고 ‘보행자 광장 ’을 조성키로 하자 반대가 거셌다. 하지만 뉴욕시는 “불쾌하고 위험한 보도를 그냥 놔둘 순 없다. 결과가 나쁘면 철회하겠다”며 시민과 상인을 설득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보행자 사고가 35%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5개의 초대형 매장이 문을 열고, 임대료는 상승했다. 차로를 막자 대중교통 이용이 늘면서 인접 도로의 차량 속도는 오히려 5~7% 빨라졌다.

 지난 12일 기자가 찾은 타임스스퀘어는 차로를 줄이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뉴욕에서 20년간 살았다는 시민 에릭 그란달(41)은 “공사 때문에 매우 불편한 게 사실이지만 이곳이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찬성”이라고 말했다.

 ‘도로에서 보행공간으로’의 변화는 유럽에선 이미 20여 년 전에 시작됐다. 1988년 만들어진 프랑스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 92년 조성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트리니타 공원, 2009년 완성된 스위스 취리히의 오세르힐레 고가는 도로를 줄여 보행공간을 넓힌 대형 프로젝트였다. 정석 시립대(도시공학) 교수는 “세계적 거대 도시들은 오래전부터 차량 수용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며 “결국 선진 도시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대중교통을 확대하고 자동차를 밀어내고 보행로를 넓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3일 ‘차 없는 거리’가 된 서울 신촌 연세로 일대 모습. 서울시와 서대문구는 올해 초 신촌 연세로 일대를 대중교통전용지구로 지정했다. 주말에는 차 없는 거리로 운영 중이다. [김상선 기자]

 한국에서도 역대 민선 시장들이 도심을 보행자 중심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민선 1기인 조순 전 서울시장은 국내 최초로 보행자 환경을 전담하는 ‘녹색교통계’를 만들었다. 고건 전 서울시장은 ‘걷고 싶은 거리’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정동·석촌호수 등을 걷는 거리로 조성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청계천·서울광장·숭례문광장을 조성해 도심 보행 구조를 바꿔놓았다. 버스 중앙차로제는 보행공간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다.

 디자인을 강조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경우 강남대로에 미디어보드를 설치하는 등 보행과 관광산업을 연계시키려 했다. 정 교수는 “정치 지형이 다름에도 그들의 정책 방향이 비슷했던 건 보행공간 확대가 대세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보행공간의 확대가 경제적 효과에 그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보행로의 확대는 ‘일상의 민주주의’를 앞당길 수 있다. 서울시 이원목 보행자전거과장은 “서울 도심의 길 80%가 찻길이고 찻길의 80%를 승용차가 점유하고 있지만 승용차의 교통 분담률은 23.5%(2011년 기준)에 불과하다”며 “보행로 확대는 사회적 평등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길의 불평등’ 문제가 부각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자주 활용되는 개념이 ‘차 없는 도로’다. 너비 100m에 이르는 세종대로는 도심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다. 서울시뿐만 아니라 언론사와 스포츠업체 등이 휴일에 차량이 통제된 세종대로에서 기부 장터, 달리기, 김장 담그기 등 다양한 행사를 펼치고 있다. 서울시립대 김기호(도시공학) 교수는 “도로는 사유재산이 아닌 공유물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 없는 거리’는 문화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김 교수는 인사동 문화의 거리를 예로 들면서 “90년대만 해도 반대가 많았지만 차량 통제 후 시민과 관광객이 찾는 상권을 형성하면서 스스로 소프트웨어를 갖춘 자생적 공간이 됐다”고 제시했다. 신촌 연세로가 올해 대중교통 전용지구로 지정돼 차로를 대대적으로 줄인 것도 경쟁 상대인 홍대의 걷고 싶은 거리에 대응하기 위한 생존전략이다.

특별취재팀 : 뉴욕 =강인식 팀장, 강기헌·구혜진 기자, 이은정(단국대) 인턴기자 kangis@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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