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군의관으로종군, 두발잃어 피아니스트로 새삶찾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1951년4월 부산 제 5육군병원 장교병실의 한 병상에서 나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겨레의 비극인 6·25는 나개인에게도 인생의 방향을 돌려놓은 사건이었다.
6·25가 나던 해 나는 서울대의대를 졸업했다. 서울대법원의 인턴으로 근무하던중 6·25가 터졌고. 나는 군의관으로 전선에 달려갔다.
50년11윌 제8사단 10연대1대대의 의무대장으로 배속돼 강원도홍천 성지봉전투에 참가했다. 접전끝에 우리사단은 후퇴했고,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상당수는 적의 포위망에 갇혔다. 나도 그 포위망속 낙오명의 하나였다.
적의 눈길을 피해 밤에만 눈덮인 산길을 더듬어 남으로 남으로 필사의 탈출을 계속하던 1주일. 사흘을 꼬박 굶었다. 눈을 삼켜 허기를 달래며 걷다보니 어느 틈에 군화도 벗겨져 나가고 맨발이었다.
1주일만에 산간의 어느 외딴 농가를 발견하고 더이상 버틸수 없을만큼 지친몸을 처음으로 온돌방에 뉘었다.
죽음과도 같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보니 이게 웬일인가 두발이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다. 동상이었다.
탈출하는데 바빠서 의사인 내가 동상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못한 것이었다.
3일뒤 반격해온 국군 6사단 수색대에극적으로 구출돼 부산에 후송됐을 때는 발이 이미 썩어든 뒤였다.
나는 두 발을 잘라주도록 자청했다. 발목아래 두발을 잘라내고 병상에 누운 나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차라리 죽고 말까. 생사의 번민가운데서 나에게 새삶의 힘을 준것은 바이얼리니스트 안병소선생의 격려였다. 그는 소아마비였다. 『이봐 정군, 나도 이처럼 다리가 불편하지만 열등감을 느낀 일은 없네. 나는 음악가이고 내 음악에 불편한 다리는 아무 상관이 없지않은가. 자네에게도 음악이 있지않나. 힘을내게.』안선생님은 내게 즉석에서 리사이틀 프로그램을 작성해 보이셨다.
그렇다. 내게는 음악이 있다. 리사이틀프로그램을 보는 순간 갑자기 힘이 솟았다. 음악은 내 어려서부터의 동경이었다.
국민학교도 들어가기전에 오르간을 배웠고, 다시 피아노를 익혀 내 평생의 업으로 삼으려했으나 의사가 돼야한다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의대에 진학했던 나였다. 취미로 간직하려던 피아노를 이제 인생의 업으로 삼자. 나는 결심했다.
그해 9월에 육군대위로 퇴원과 동시에 제대하고 1년여만인 이듬해11월5일 피난수도 부산의 이화여대강당에서 나는 목발을 짚고 첫번째 리사이틀 무대에 섰다.
입추의 여지없이 장내를 메운선후배·친지·음악동호인들은 뜨거운 박수로「재생의 피아니스트」를 격려해줬고 이후 30여년 나는 피아노의 한길을 걷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