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불법 도청 '판도라 상자' 둘러싸고 說만 무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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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 시절 정계와 재계, 언론계, 재야 등 각계 각층을 광범위하게 도청한 것으로 추정되는 안기부 도청자료가 검찰의 손에 무더기로 넘어가면서 그 내용과 공개 여부를 놓고 온갖 설(說)들이 난무하고 있다.

일부 내용은 현재 살아있는 정치, 재계의 치부와 관련된 내용일 수도 있어 '판도라의 상자'로 불리는 안기부 불법 도청자료를 손에 쥔 검찰의 고민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려면 아직 풀어야 할 의문점이 많이 남아있다는 지적이다.

◇정치권 표적 도청이었을까 = 도청 내용과 관련해 일부에서는 YS 정부가 야당 정치인들을 겨냥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YS정부가 탄생한 1992년에 해체됐던 미림이 정권의 핵심 관계자의 지시로 2년여만에 재건됐다는 게 그 근거다.

불법 도청 자료를 넘겨받은 김대중 정부가 집권 초 도청 실태와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도 침묵한 것은 자료가 자신들의 치부를 담고 있었기 때문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국정 농단'으로 비난받았던 점을 감안하면 야당 정치인들이 주요 도청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검찰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다수설이다. 그들 중 일부는 김대중 정부를 거쳐 지금도 정치에 몸담고 있는 인물일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검찰은 보안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나 언론을 통해 공개된 X파일에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의 대화가 담긴 점을 보면 야당 정치인에 대한 표적 도청과 함께 5대 그룹, 주요 언론사 등 '사찰' 성격의 광범위한 도청 자료가 검찰 압수물에 포함됐을 것이라는 추론도 설득력 있게 나오고 있다.

◇성공한 거래는 없을까 = 공씨와 재미동포 박인회(구속)씨가 단 한 차례만 거래를 시도했을까도 의문이다. 공씨 테이프엔 정.관계와 재계, 언론계 고위층의 은밀한 대화가 담겨 있다.

과연 이런 '물건'을 수백 개 확보한 이들이 삼성과만 거래하려 했을 것인가는 의문이다.

박씨의 구속영장엔 "삼성측에 5억원을 요구했다"고 돼 있다. 따라서 공씨가 다른 대기업 최고위층과 정계 인사의 대화록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있고,이를 거래하려 했을 수도 있으며,이 같은 거래가 성사되고 해당 테이프는 어둠 속에 묻혀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삼성 이외에 다른 기업.관련자들을 협박했거나 거래를 시도했는지도 밝혀져야 할 대목이며 검찰의 몫이다.

◇도청 내용은 공개되나 = 대화 내용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기 때문에 영원히 비밀에 묻힐 가능성이 크지만 도청 장소나, 도청 대상 등에 대해서는 과거사 규명 차원에서 공개될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정치권, 재계인사들이 '밀담'을 위해 사용했던 장소가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대략 밝혀질 수도 있고, YS 정부가 어떤 계층을 중심으로 도청했는지도 정리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밀담 장소를 특정해서 실명으로 밝힐 수도 없는데다 도청 대상 범위는 어느 정도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이뤄진 이상 그 정도의 내용 공개가 진상 규명과 대국민 해명에 도움을 줄 지는 미지수다.

도청 내용 중 범죄 관련 혐의가 뚜렷하다면 검찰이 그 세부 내용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자료가 갖는 '파괴력'을 감안할 때 그 내용을 공개할 경우 사회에 미치는 충격파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신중론도 있다.

◇내용파악 언제쯤 끝날까 = 자료들이 검찰의 분석과 여러 검증을 거쳐 개략적인 방식으로 알려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란 관측이다.

단순 산술계산을 해보면 120분 분량의 테이프 274개를 한번씩 듣는 데 걸리는 시간은 548시간, 일수로 환산하면 22일 남짓이다.

1명의 인력을 투입할 경우 22일, 2명이면 11일, 4명이면 5일 가량 걸린다는 얘기다.

그러나 검찰이 이번 사건처럼 폭발력 있는 자료들을 다수 인원을 동원해 확인하기는 쉽지 않고, 검찰 내부의 소수 정예 인원이 작업에 투입될 것으로 예상돼 판도라 상자의 내용물을 파악하는 데는 최소 2주는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검찰이 테이프가 불법 도청물인지를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내용 분석에 들어간다면 소요시간은 더 길어진다.

120분 분량의 테이프 1개를 기록하는 데 10시간 정도 걸린다는 녹취전문가들의 설명을 감안하면 공씨 집에서 발견된 테이프를 문서화는 데 1명을 투입하면 2740시간, 즉 110일 정도가 걸리고 2명으로는 55일 가량 소요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테이프를 문서화하는 데 4명을 투입한다 해도 한달 가까운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디지털뉴스센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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