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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 열풍 어떻게 볼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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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옷차림에 거침이 없는 시대다. 개성대로 입는다. 그러나 눈여겨볼 현상은 치마를 입는 젊은 여성들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패션 전문가들은 "치맛바람이 일시적 패션은 아닌 듯하다"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성학자들은 "여성들의 자신감을 반영한 현상"이라고 접근한다.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남녀평등을 외치던 여성들이 이제는 여성성이 더 우월한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간파한 결과라는 것이다. 패션이냐 자신감의 발로냐, 전문가들이 정답을 궁리하는 동안 치마 열풍은 태풍으로 바뀔 채비다.

*** 김경 32.패션지 '바자'기자

▶ 2005년 치마 물결

▶ 1990년대 바지 물결

나는 91학번이다. 때는 이미 '태백산맥'이나 '자본론'에 붙들려 있는 선배들의 독서 취향이 후져 보이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철의 노동자'를 부를 때 액세서리처럼 얹혀지는 그들의 비장한 손짓이 좀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때였다. 우리는 하루키를 읽었고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열광했다. 개중에 몇몇은 구경 삼아 선배들을 따라 시위에 나갔겠지만 다른 몇몇은 잔디밭에 누워 여자 아이들의 치마 구경을 했다.

그때만 해도 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여자 애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중에 생각나는 여자 아이가 있는데, 그녀는 거의 매일 같이 짧은 스커트만 입고 다녔다. 하루키식 표현에 의하면 '100퍼센트 여자 아이'였다. 러플이 달린 짧고 귀여운 스커트 아래 언제나 하얗고 날씬한 다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공들여 화장을 했고, 머리는 늘 세팅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무척이나 새침했다.

남자 애들은 자기들끼리 그 애에 대한 사모의 정을 나누었는지 모르겠지만, 여자 애들은 그 애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뭐랄까? 우리는 어이없게도 그 애가 어여쁜 육체를 담보로 괜찮은 남자를 하나 물어서 시집 잘 가는 게 인생의 목표일 거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만날 바지만 입는 여자 애들은 이상하지 않지만 만날 스커트만 입는 여자 애들은 좀 수상하게 보던 시절이었다. 보통은 연애 초기에 관심 있는 남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처박아 두었던 스커트를 꺼내는 정도였으니까. 특히나 1980년대 말까지 남성스러운 것과 여성스러운 것의 정의가 모호한 의상 스타일(유니섹스 룩이나 앤드로지너스 룩이라 불리는 트렌드)이 강세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사실 여자라면 누구나 스커트라는 패션 아이템에 매혹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여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여성성에 매혹되도록 디자인 되었다고 믿는다. 중세 시대 남녀가 혼용한 스커트가 여성의 전유물이 되면서부터 그것이 상징하는 건 언제나 여성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 세대의 여대생들은 가부장제 질서 위에 구현된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일을 무슨 숙제처럼 안고 있었던 것 같다. 일례로 내가 대학 때 여성학 교재로 공부한 '또 하나의 문화'라는 동인지에는 "미니 스커트가 어쩌다 남성의 것이 아닌 여성의 패션이 됐는지 심히 유감이다"라고 씌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완전히 달라졌다. 페미니즘은 구닥다리 학문이 되어 버린 지 오래고 '옷의 사회학'도 실은 지겨울 따름이다. 여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여성으로서의 자기 욕망에 솔직해졌고 자신의 여성성을 마음껏 사랑하고 또 자랑하게 됐다. 또한 어떤 사회적 위치나 자의식에 방해받지 않고 그저 자신의 만족이나 취향에 따라 옷이나 트렌드를 즐기게 됐다. 여성성이나 트렌드의 종속을 긍정하는 것으로 좀 더 자유로워졌다고 할까? 말하자면 여성성이든 트렌드이든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고 믿게 된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시즌을 거듭할수록 여성성을 강조하는 '페미니티 코드'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특히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치맛바람이 거세다. 캠퍼스나 거리에 나가 보면 온통 스커트 물결이다. 보헤미안과 히피, 레이디라이크 룩이 패션계를 강타하면서 폭이 넓은 풀 스커트나 프릴이 많은 티어 스커트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얼마 전에는 그동안 스커트에 대해 남다른 열정과 해석을 보여준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가 88년부터 현재까지 선보인 스커트들만 모아서 보여준 전시회가 도쿄와 상하이에서 열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재미있는 건 지난해부터 다리 굵은 여자들도 미니 스커트를 입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체 조건이든 남의 눈이든 의식하지 않고 스커트를 즐기는 아가씨들이 부쩍 눈에 띄고 있다. 패션계에서는 이번 시즌엔 다리를 드러내지 않고도 스커트를 즐길 수 있는 아이템들이 많아져 치마 열풍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고 있다. 여성들이 여성적인 패션을 마음 놓고 즐기는 시대가 된 것이다.

*** 박정애 35·소설가, 삼척대 교수

딸아이는 내가 골라주는 대로 순순히 잘 입다가도 불시에 팩팩거리며 옷 투정을 한다. 딸의 얘긴즉슨 엄마가 허구한 날 바지만 입혀서 지겨워 죽겠다, 제발 치마 좀 입자는 것이다. 딸이 제일 좋아하는 스타일은 레이스 치렁치렁 늘어진 원피스 종류다. 성별에 대한 편견 없이 키우려고 내 딴에는 무지 노력하는데도 딸의 취향이 왜 그런 식으로 치우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딸아, 그런 거 입고 놀면 엄청나게 불편하단다, 노는 덴 활동성 좋은 반바지가 최고야, 어쩌고저쩌고 설득해 보는데, 씨알이 먹히질 않는다.

실제로 딸은 그런 공주 치마를 입고도 사방팔방, 전혀 불편하지 않게 잘만 쏘다니고 잘만 논다. 짙은 색깔의 바지 같으면야 그렇거나 말거나 세탁기 훌렁 돌려 버리면 그만이지만, 레이스 달린 치마는 옷이 상하지 않게끔 얼룩을 지우고 세탁하는 일이 영 수월찮다. 그러고 보면 내가 딸에게 구태여 어두운 색상의 바지를 골라주는 건 딸의 불편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나의 불편이 성가셔서다.

대학 시절 총여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던 여동생은, 내 기억으론, 학교 다닐 때 단 한 번도 치마를 입지 않았다. 면 티셔츠에 청바지가 그녀의 제복이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동생은 내 딸보다 더한 공주 의류 매니어다. 옷을 사도 어디서 그런 '야시꼬리(경상도 사투리로 야스럽고 색스럽다는 뜻)'한 옷만 사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렇다고 뭐 벌써 서른을 훌쩍 넘긴 동생에게 무슨 옷을 입어라 마라 간섭할 요량은 손톱만큼도 없다. 다만 학창 시절에는 어떻게 저런 취향을 억누르고 살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저 '야시꼬리'한 옷들도 피부 탱탱하고 군살 없던 푸른 시절에 입었더라면 좀 더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는 곧 픽,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시폰 소재의 노을빛 끈 원피스를 입은 운동권이라니,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소위 너무나 여성적인 옷차림을 하고 여성적 말투를 쓰는, 지극히 여성적인 여학생이 단상에 올라 선동적인 연설을 하고 구호를 외치며 팔을 휘두른다면 어째 코미디 같지 않겠는가. 아멜리아 블루머의 시대에는 코르셋과 페티코트로 살과 뼈를 단단히 옥죄고 걸어 다니는 빗자루가 될 수 있게끔 질질 끌리는 긴 드레스를 입어야 '올바른' 숙녀 소리를 들었다는데, 저 1980년대의 영향권 아래에서는 모름지기 맨얼굴에 생머리, 판화와 구호가 찍힌 단체 티셔츠에 바지 차림이어야 광장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올바른' 여학생이 될 수 있었다.

가부장제.군사주의.국가권력의 경직성과 남성성을 저도 모르게 답습한 운동권 내부의 경직성과 남성성이 여학생들에게 은연중에 '남성 따라잡기'를 요구했던 시대, '남성 전사 산 오를 때 함께 오르는 여성 전사'를 노래하던 시대, 운동권으로의 투신과 '야시꼬리'한 옷을 입고픈 욕망은 공존할 수 없었다.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요즘 여대생들은 그런 면에서 우리 세대보다 훨씬 자유로워 보인다. 바지고 치마고 간에 일단 가짓수가 많으니 선택의 폭도 넓은 것 같다. 한여름에 양털 부츠를 신고 한겨울에 초미니 스커트를 입는다. 스킨십이라기보다는 성관계라고 해야 할 수준의 그림이 찍힌 티셔츠를 입고도 거리낌이 없다. 그녀들도 주민등록증 가진 어른들인데 뭘 입건 그녀들이 알아서 선택할 문제이리라. 나야 당장 내 가사노동을 가중시키는 딸의 의복 문제나 신경 쓰면 그만이다. 그래도 딸의 치마까지 내 선입견에 가두지 않아야할 텐데….

어차피 멋대로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많은 이 세상, '그까잇꺼' 옷이라도 제멋대로 입고 사는 것이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그 제멋이 그야말로 제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멋인지 패션 자본에 의해 주입된 멋인지는 한번쯤 돌이켜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