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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소리 없이 지나간 '300회 사제혈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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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조훈현-이창호의 300번째 사제대결이 조용히 지나갔다. 어떤 세리머니도 없이, 17일 밤 바둑TV 한쪽 스튜디오에서 일상적인 바둑 한판처럼 그렇게 치러졌다.

문득 바둑이 미국에서 시작한 것이고 이런 일이 미국에서 벌어졌다면 어찌됐을까 하는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지금도 떠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이라면 기적과 드라마로 가득찬 이들의 사연을 그토록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훈현 9단은 1953년생이고 이창호 9단은 75년생이니까 두 사람의 나이는 22년 차이가 난다.

84년 당시 무적함대로 군림하던 조훈현은 아홉 살의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인다.

조훈현은 10여 년 후 자신이 정상과 멀어질 때쯤 해서 이창호가 자신의 위치를 이어받기를 바랐을 것이다.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것 아니냐"는 동료들의 농담은 그냥 농담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농담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창호는 14세 국내 우승,17세 세계 제패 등 숱한 신기록을 세우며 조훈현의 영토로 곧장 쳐들어왔다. 한집 아래위층에 살던 그들은 조 9단의 부인 정미화씨가 운전하는 차를 함께 타고 와 나란히 대국장으로 걸어갔고 온종일 싸웠다.

젊은 제자는 늙은 스승을 이김으로써 가르침에 보은한다. 그러나 이들의 승부는 달랐다. 이들의 승부는 일인자인 스승과 너무 빨리 자란 천재 제자가 바둑계의 왕좌 자리를 놓고 벌이는 사투였고 혈전이었다.

94년 무렵, 이창호는 조훈현의 거의 모든 타이틀을 정복했다. 이들의 싸움이 여기서 끝났더라면 사제대결은 그토록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산으로 넘어간 듯 보였던 '지는 해' 조훈현이 기적처럼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창호가 세계 최정상이었으므로 그와 대결하려면 정상 근처에서 버티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조훈현은 22년의 차이를 극복하고 제자와 끝없이 싸웠고 가끔은 고토를 수복하기도 했다.

동시에 이들 사제는 힘을 합쳐 세계바둑을 완벽하게 제패했다.

그러나 50대에 접어들면서 조훈현도 조금씩 쇠락했다. 제자와의 대결도 뜸해졌다. 그래서 이번 300번째 대결은 299번째 대결이 끝난 뒤 근 1년 만에 이뤄졌다. 아마도 이들의 대결은 점점 더 뜸해질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동시대에 활동하기도 어려운데 300전이라니! 몇백 년이 지난들 이런 사제가 다시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한국기원은 이 기막힌 장면을 '바둑'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

별거 아닌 것도 잘도 포장해 내는 미국 생각이 난 것은 그 아쉬움 때문이다.

2005 바둑리그의 300번째 대결에선 이창호가 승리했다. 통산 전적은 이창호 기준으로 182승 118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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