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빙자 사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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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사정협의회는 27일 상오에 열린 금년도 제2차 전체회의에서 특권층을 빙자, 권력을 과시, 남용하거나 사칭하는 행위를 엄단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단속하는 방안을 확정, 발표했다.
『국민생활을 위해하는 행위를 근절 시키라』고 한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성안된「권력빙자 사범 근절대책」에 따르면 이른바 권력층 빙자사범은 구속수사를 윈칙으로 하고 인·허가취소, 재정지원 중단 등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무거운 형사적 행정적 제재조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이 방안은 또 고위층 특수층을 빙자한 권력의 남용이나 과시행위에 국민이 현혹되지 않도록 계도를 철저히 하고 모든 공직자는 권력을 빙자한 청탁압력을 과감히 배격하여 소신있게 업무를 추진키로 했다.
생각해 보면 정부가 가능한 모든 사법·행정조치를 동원할 정도로 권력층을 빙자해서 못된 일을 저지르는 자들이 날뛰고 있다는 것은 이사회의 전근대적인 불행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권력에 약하고 권력에 맹종하는 우리의 국민의식은 연원을 따지면 관존 민비 적인 우리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 급제, 벼슬길에 오르는 것만이 유일한 출세의 수단이었던 이씨조선의 전통이 아직껏 우리의 의식 속에 남아 권력빙자사범들이 날뛸 수 있는 소지를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의 이 같은 의식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권력층이라면 무조건 쩔쩔매고 소신 없이 맹종하는 공직자들의 자세에 있다b
권력층을 빙자해서 인사청탁을 하거나 이권에 개입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일을 뿌리 뽑으려면 우선 이런 행위를 고발하는 체제부터 확립되어야한다. 사정협의회가 이른바「특수층 빙자행위」를 각급 검찰청과 사회정화위원회에 신고 창구를 설치, 일반시민의 신고를 받기로 하고 공직자에게도 소속기관장을 통해 사정기관에 보고토록 의무화한 것은 그런 뜻에서 당연한 조치다.
문제는 오히려 그 다음에 있다. 권력을 빙자해서 바람직스럽지 못한 행위를 한 사람을 상부에 보고하거나 신고를 해도 그 결말이 흐지부지되거나 공직자의 경우 도리어 화를 입는다면 신고 권장이나 보고 의무는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50년대의 이른바「가짜 이강석 사건」은 공직사회에서 권력을 빙자한 행위가 얼마나 잘 먹혀 들어가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낸 희화적인 사건이었다.
권력 지향적이고 관료적인 이런 악풍이 그대로 남아있는 한 우리가 지향하는바 근대화란 요원한 일 일 수밖에 없다.
사회 각계각층이 고루 발전하고 사회가 다원화해서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우리사회는 근대화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게된다.
권력이 있다고 해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그 권력을 이용하려는 행위를 뿌리뽑는 길은 그런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풍토를 먼저 만드는 일이다.
사정협의회가 마련한 대책은 그런 행위를 근절시키고 말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으나 정부의 의지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인 것이다. 그리고 그 참여가 바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는 길임을 일깨워주는 일이어야 한다.
전 대통령의 지적대로 『고위층의 이름을 팔아서 일을 해결하려는 나쁜 의식구조는 반드시 개혁되어야하며, 정정당당하게 국민의 한사람으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그런 풍토를 조성하는 일』이야말로 근대적인 민주국가를 건설하는 첩경임을 다같이 명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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