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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무엇이 패스트리빙 열풍을 불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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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住)의 시대에서 주(住)의 시대로.

무슨 말장난이냐고요. 아닙니다. 앞의 주(住)는 소유 개념의 집, 그리고 뒤의 주(住)는 거주 개념의 집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한국인에게 집이란 삶의 목표 성격이 강했습니다.

내 집 마련, 아파트 평수 넓히기 등 재산불리기 수단으로써의 집 말입니다.

하지만 내 집 마련의 열망이 한풀 꺾인 지금, 비로소 한국인은 집을 투자 대상이 아니라 내가 지금 사는 공간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리빙 시장의 급성장, 특히 패스트 리빙 브랜드의 잇따른 한국 진출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있습니다.

안혜리 기자 hyeree@joongang.co.kr

지난달 30일 오전 11시 서울 잠실 제2롯데월드몰 1층 H&M 매장 앞에서 문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 이날 국내 1호점을 여는 H&M 홈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사진 H&M 홈]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잠실 제2롯데월드몰 1층에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긴 줄이 늘어섰다. H&M 홈 매장에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H&M 홈은 스웨덴의 패스트패션(SPA·제조유통일괄형) 브랜드 H&M이 2009년 론칭한 인테리어 소품 브랜드로, 한국엔 이날 첫선을 보였다. 정해진 H&M 홈 실장은 “매장 오픈 시간인 오전 11시 전부터 기다리던 고객수는 1300여 명”이라며 “이렇게 많은 줄이 선 건 H&M이 서울 명동에 1호점을 냈던 2010년 이후 처음”이라고 말했다.

디저트 하나 사먹겠다고 긴 줄 늘어서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인테리어 소품 매장 구경하겠다고 평일 오전부터 1300명이나 몰리다니, 대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런가 하면 지난 14일엔 하루 종일 스웨덴의 DIY가구업체 이케아가 주요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 상위에 올랐다. 다음 달 경기 광명에 1호점을 내는 이케아가 이날 한국어 홈페이지를 오픈하며 제품 가격을 공개한 여파였다. 전문가들은 “H&M이나 이케아 등 개별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가 영향을 끼쳤겠지만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인의 관심사가 패션(의·衣)에서 먹거리(식·食)로, 그리고 인테리어(주·住)로 넘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트렌드 코리아 2015』 공동 저자인 전미영 서울대 소비자학과 연구교수도 “라이프스타일숍은 2015년을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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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로 떠오른 리빙 시장

이케아는 앞서 진출했던 일본에서의 실패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한국에서는 다른 접근을 시도했다. 여러 일반 가정을 촬영해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미리 연구한 거다. 그런데 한국인의 실제 주거환경을 접한 스웨덴 본사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생각보다 너무 ‘험블(소박)’했기 때문이다. 험블하다는 건 정말 완곡한 표현이고, 실은 집주인의 취향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인테리어에 무신경하다는 얘기가 아니었을까.

안지선 레몬트리 편집장은 “인테리어는 결혼할 때나 한번쯤 신경써서 하는 것이란 인식이 있는 데다 손님초대 문화도 별로 없다보니 한국사람들은 집을 잘 꾸미지 않는다”며 “그동안 나만의 취향을 가지고 인테리어(리빙) 제품을 쇼핑하려는 욕구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마케팅을 연구하는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도 “그동안 집 꾸미는 데 돈 쓰는 건 사치라는 생각에 옷 사고 먹는 데는 지갑을 열면서도 리빙 제품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기울였다”며 “하지만 최근 관심사가 급격하게 리빙 용품으로 옮겨가고 있다”로 말했다.

과장이 아니다. 한샘은 최근 부엌가구보다 생활용품 매출 성장률이 더 가파르고, 올해 1800억원의 매출(추정치)을 올린 신세계인터내셔널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자주는 2020년 목표치를 무려 5000억원으로 잡고 있다. 그만큼 인테리어 시장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시장을 글로벌 업체가 그냥 놔둘리 없다. H&M 홈에 이어 이달 27일 스페인의 패스트패션 브랜드 자라의 인테리어 소품 브랜드인 자라 홈 한국 1호점이 삼성동 코엑스몰에 입점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는 것이다. 지난달 오픈한 삼성동 파르나스몰에는 일본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니코앤드도 들어왔다. 

이유 1) 달라진 집의 개념

예쁜 소품 한두 개만 새로 사는 게 아니라 시즌별로 공간 전체 분위기를 바꾸는 사람도 많다. 값싸면서도 트렌디한 패스트리빙이 등장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① H&M 홈의 크리스마스 테이블 세팅. ② 한샘의 신혼집 거실. ③ 자주의 침실. [사진 각 업체]

집 꾸미기에 인색했던 한국인이 왜 갑자기 리빙용품에 눈을 뜬 것일까. 일본을 비롯해 다른 많은 나라가 그러했듯이 “소득수준의 상승”(남명우 성균관대 경영학과 교수) 같은 보편타당한 이유도 여럿 있다. 하지만 한국적 특성이 담긴 요인을 꼽으라면 단연 부동산이다. 역설적으로 부동산 시대가 저물면서 리빙 시대가 열린 것이다.

동덕여대 최순화 교수는 “지금까지 한국인에게 집이란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니라 가장 확실한 투자대상이자 삶의 목표였다”며 “집값이 너무 뛴 데다 부동산 투자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 내 집 마련과 아파트 평수 넓히기라는 목표를 버리는 대신 지금 사는 공간을 잘 꾸미는 걸로 관심사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전에는 집 꾸밀 돈이 있으면 한푼이라도 더 아껴서 부동산 자금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그런 목표가 없으니 집 인테리어에 더 투자한다는 얘기다. 여기서 말하는 인테리어란 실내 구조를 바꾸고 도배하고 칠하는 인테리어 공사가 아니다. 소품으로 집안 분위기를 바꾸는 걸 말한다. 최 교수는 교외 타운하우스에 사는 미국 중산층을 예로 들었다. 집 살 꿈에 부풀어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보다는 철 바뀌면 으레 옷 하나 장만하듯 시즌별로 소품 가구나 커튼, 쿠션 등을 조금씩 바꾸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그런 문화 말이다. 한국도 이제 투자 목적이 아니라 거주 목적으로 살다보니 오히려 집안 꾸미는 데 좀더 신경 쓸 여유가 생긴 셈이다.

인터패션플래닝(트렌드분석회사) 라이프스타일 사업부 수석연구원 출신인 황선아 인천대 대학원 뷰티산업학과 연구교수도 비슷한 분석을 한다. 황 연구교수는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다들 집을 투자 개념으로만 바라봤다”며 “그렇다보니 잘 꾸미고 살기보다 언제라도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할 준비가 돼있고, 또 앞으로 값을 더 받고 되팔수 있는 지 여부만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부동산 시대가 저무는 것과 동시에 1970년대생들이 주요 소비층으로 떠오르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배고파봤던 50~60년대생이 주요 소비층이었을 때는 먹고 사는 것만이 중요한 관심사였지만 유학이나 해외여행 등을 많이 경험한 70년대생들은 주거공간에서도 삶의 질을 따진다는 것이다.

이유2) 싱글족의 확산

리빙 시장, 즉 소품 가구나 생활용품 매출의 급성장에는 싱글족(族), 즉 1인 가구의 급증도 한몫한다.

한샘 관계자는 “1인 가구는 새집으로 이사한다 해도 결혼한 가정에서 하듯 대대적으로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대부분 인테리어 소품으로 변화를 주려고 하기 때문에 1인 가구가 늘어날수록 인테리어 소품 매출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1인 가구가 많지 않던 시절 국내 가구업계에선 혼수시장 비중이 컸다. 혼수로 가구나 커튼 등을 살 때는 최소 10~20년 쓴다는 생각에 돈을 조금 더 주더라도 품질 좋은 제품을 찾았다. 당연히 유행을 타지 않는 무난한 디자인이 인기였고, 한번 갖춰놓으면 특별한 계기 없이는 더 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임대차보호법에 기대 혼자 2년마다 전세와 월세를 전전하는 이른바 ‘이케아 세대’는 자신들의 높은 안목을 값싸게 충족시켜줄 수 있는 제품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특임교수는 저서『이케아 세대 그들의 역습이 시작됐다』에서 30대 중반의 주머니가 얇은 고학력 세대를 이케아 세대라고 칭하면서, ‘머리로는 샤넬을, 현실은 다이소를 소비하는 세대’로 규정했다. 불안정한 현실과 미래 탓에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만큼 이들의 소비는 값 싸면서도 매력적인 디자인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상대적으로 주머니가 두툼한 싱글족에게서도 이런 성향을 찾아볼 수 있다. 계절에 따라, 혹은 크리스마스 등 시즌별로 인테리어에 변화를 주는 경향도 1인 가구에서 강하다. 부모를 비롯해 취향이 다른 여러 가족과 함께 살 때보다 훨씬 쉽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신나영 리빙디자인 대표는 “나만의 스타일로 지금 원하는 공간연출을 하는 성향은 확실히 1~2인 가구에서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이유3) SNS의 일상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도 리빙 용품에 대한 관심을 높인 주요 요인 중 하나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태오씨는 “스마트폰으로 내가 사는 공간과 내가 고른 소품을 찍어 인스타그램 등 SNS에 올려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며 “이젠 우리 집 인테리어가 내 취향과 안목을 남에게 어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됐다”고 말했다. “옷이나 가방·신발만으로는 자신을 표현하기 부족하다”는 것이다.

서울대 전미영 연구교수도 “SNS가 발달하면서 사진찍기가 삶에 큰 영향을 줬다”며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SNS를 하는 주요 이유라고 했을 때 사진 배경으로 나오는 멋진 홈 스타일링이 더욱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전 교수는 또 “전에는 데코레이션 자체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며 “기껏해야 잡지에 나오는 컨셉트에 맞춰 꾸미거나 대형 냉장고·TV 들여놓고 과시하는 데 의미를 뒀지만 이제는 내 취향을 드러내는 소품을 통해 안목을 자랑하고 싶어한다”고 덧붙였다.

다들 나만의 개성과 안목을 드러내는 도구로 인테리어를 활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결국 남 따라하기의 일종이라는 주장도 있다. 동덕여대 최순화 교수는 “한국인은 집단소비심리, 즉 남이 사는 건 나도 사야한다는 인식이 강하다”며 “특히 SNS 때문에 유행이 번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고 말했다. 과거엔 남이 루이비통 들면 나도 들어야 하고, 남이 도지마롤 먹으면 나도 먹어야 했는데, 이제 그 심리가 리빙 분야로까지 넘어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유4) 패스트리빙, 드디어 지갑을 열다

사실 이미 1990년대 말부터 인테리어 소품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외환위기로 잠시 주춤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장이 커졌다. 이마트가 2000년 자연주의(지금의 자주)를 론칭하고, 2004년 일본 무인양품이 국내에 진출한 시기다. 또 최근 몇 년 새 국내외 인테리어 소품을 파는 편집숍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H&M 홈과 자라 홈, 그리고 이케아 등 이른바 패스트 리빙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리빙 쇼핑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유가 뭘까. 안지선 레몬트리 편집장은 “기존의 한국 인테리어 시장은 철저하게 고가와 저가로 양분된 시장이었다”며 “지갑을 쉽게 열 수 없을 만큼 비싸거나 싸구려 인터넷 제품뿐이라 한국 사람들의 높아진 생활수준에 버금가는 쇼핑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H&M 홈이나 자라 홈, 이케아 등 합리적인 가격에 디자인까지 좋은 패스트리빙 브랜드가 들어오면서 리빙 용품이 단순한 눈요기용에서 실제 쇼핑 아이템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동덕여대 최순화 교수도 비슷한 생각이다. 최 교수는 “한국인의 주생활은 소위 사제라고 불리는 싸구려 상품이거나 값비싼 유럽 제품으로 양극화돼 있었다”며 “합리적인 가격대에 트렌디한 제품이 없던 차에 이를 충족시켜주는 시장이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그는 “특히 이들 패스트리빙 브랜드가 1인을 위한 제품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존에도 한샘이나 까사미아 등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용품 브랜드가 있었지만 가족용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젊은 사람이나 1인 가구에 다가가기 어려웠다. 하지만 H&M 홈 등은 개인을 위한 소품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보다 많은 사람이 좀더 자주 주머니를 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분석이다.

안혜리·윤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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