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의 중심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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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혁명가에겐 보다 나은 미래를 그려내는 비전과 이를 관철시키기 위한 뚝심, 그리고 동참을 이끌어내는 친화력이 필수다. 이런 의미에서 국립암센터 박재갑(朴在甲.55)원장은 가위 혁명가다.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의료인치고 보기 드물게 이 세 가지 요소를 두루 갖췄기 때문이다. 그는 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창조적 변화를 모색한다. 황무지에서 암센터를 일궈낸 것도 그렇고, 개원 후 센터의 운영에서도 곳곳에 혁명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1980년대 후반 암센터 얘기를 처음 꺼냈을 때만 해도 돈키호테 같다는 눈총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미 암으로 인한 사망이 전체 사망원인 중 1.2위를 다투는 상황인데도 국가 차원의 관리가 시급하다고 주장하면 여건이 어떻다는 둥 이유를 대며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합디다. 하지만 지금 보세요. 암센터가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지 않습니까."

암센터가 이제 고작 세살배기(2000년 3월 법인설립, 10월 진료 시작)이면서도 '세계적 기관'이란 평가를 듣는 데는 박 원장의 역할이 컸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지난 3월 임기 3년의 원장에 연임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뭣합니다만 장비와 인력, 시스템 등 모든 면에서 국민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앞으로 몇 년만 바짝 다지기를 하면 명실상부한 세계 제일의 암 전문기관이 되리라 장담합니다."

사실 암센터엔 최신 진료장비와 내로라 하는 암 관련 석학들이 포진해 있다. 이는 '최고'란 이미지를 갖추기 위해 박원장이 구사한 초호화전략에 따른 것으로 단기간에 암센터 위상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거뒀다.

국내 발병이 많은 위암과 간암, 자궁암에 대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세계 최고수준이며 유방암.폐암.대장암 등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비는 예산 문제인데 반해 인력은 그렇지 않습니다. 젊은 인력 중에도 엄청난 물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3년간 틀을 잡는 데 주력했다면 앞으로 3년 임기동안엔 이들을 세계적 스타로 키워내는 일이 제 소임일 겁니다."

박원장의 혁명적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대목은 뭐니 뭐니해도 환자 중심의 진료 시스템. 이곳엔 여느 종합병원과 같은 진료과(科)가 없다. 대신 암 종류와 진료 내용에 따라 10개 센터로 운영된다.

"의료 지식이 없는 환자들을 진료 과목을 찾아 이리 저리 옮겨 다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센터별 전문 의사와 전문 간호사들이 함께 돌며 환자를 돌봐줍니다. 환자의 불편을 덜어주는 것은 물론, 치료 방법도 현장에서 환자 상태에 따라 의사들간에 협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신뢰감을 더해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같은 아이디어는 박원장이 30년 의료 경험에서 얻은 것이다. 처음엔 의료계에서 파격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지금은 국내 다른 병원들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배우러 올 정도가 됐다. 지난해 말 세계적 암센터인 미국 MD 앤더슨의 원장이 방문해 진료시스템에 대해 "놀랍다"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박원장의 '환자사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키 위해 병실에 붙이는 환자이름 표지를 없앴고, 침대를 최대한 낮춰 오르내리는 불편을 최소화했다. 그의 '불도저식 밀어붙이기'가 이룬 쾌거다.

암센터 운영에 못지 않게 그가 매달리는 것은 바로 금연운동. "담배로 인한 암으로만 하루 50명씩 죽고 있습니다. 나흘에 한번 꼴로 대구지하철 참사를 겪는 셈이죠. 이 정도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주적(主敵) 아닙니까."

그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금연을 부르짖는 이유다. 어느새 그에겐 '흡연박멸주의자'란 독특한 별호가 붙었다. 충격효과를 노려 "흡연자는 마약환자"라는 등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까닭이다.

그는 장래의 국가건강을 위해선 특히 청소년들을 담배와 차단시키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지난해 방송사들을 설득해 드라마에서 흡연장면을 추방시킨 데 이어 이번엔 신문에 흡연사진이 실리지 않도록 발벗고 나서고 있다. 국민건강을 위해 그는 이래저래 바쁘기만 하다.

글=이만훈 기자, 사진=신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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