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정씨 집성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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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부고속도로를 따라가다 판교에서 동쪽으로 빠져 용인지방도를 동남으로 8km쯤. 해발4백m를 넘지 않는 아담한 산들이 사방에 포개져 분지를 이룬 곳에 한적한 시골마을이 나선다.
경기도 용인군 막현면 능원리 영일정씨 마을.
마을에서 1km남짓한 문수산기슭에 영일정씨의 정신적 지주인 포은 정몽주의 묘소가 있고 후손들은 조상의 묘를 지키며 2백여년 산아래 살아온다.
『포은공이 돌아가신 뒤 시체는 선지교 아래 버려져 있었는데 개성의 중들이 수습해 개성근교 풍덕에 묻었다가 15년 뒤에 이곳에 이장한 것이랍니다.』
종친회총무 정연관씨(62)는 포은의 묘소가 전혀 연고가 없는 용인땅에 묻힌 연고를 실명한다.
처음 포은의 유해는 고향인 경북영주에 옮길 계획으로 풍덕에서 상여로 유골을 운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을에서 서쪽으로 8km쯤 떨어진 풍덕천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상여꾼들은 상여를 놓고 기다리다 바람이 잔후 다시 길을 떠나려했으나 웬일인지 상여가 땅에 붙어 꼼짝을 않더라는 것.
이때 어떤 지사가 나타나『이것은 하늘의 계시』라면서 상여의 명정이 광풍에 날아가 꽂힌 고개너머 산기슭에 유골을 모시라고 주장했다. 그 순간 상여가 떨어져 후손들은 그 말을 따라 이곳 문수산기슭에 모셨다
『생거진천이요, 사거용인이란 말이 있지만 이곳은 용인에서도 명당중의 명당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보십시오. 2개의 젖꼭지모양 솟아난 위쪽 젖꼭지가 아닙니까.』
후손들이 산아래 마을을 이룬 것은 그보다도 2백여 1년 뒤. 포은의 7대손 정준이 병자호란을 겪은 뒤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터전을 잡았다.
현재 마을은 40여가구가 모두 정씨 한집안. 산간분지에서 가구당 6∼7마지기 논과 2천여평의 밭을 가꾸어 생계를 삼아왔으나 경제적으론 넉넉지 못한 편. 근래 버섯·야채 등 특수작물 재배와 젖소사육 등이 보급돼 다소 형편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가구당 소득이 연2백만원이 못된다.
그러나 조선조후기 한동안 이 마을은 위세가 드높던 명소였었다.
선조9넌 마을에 포은을 모시는 충열서완이 세워지고 포은의 명성을 업고 기호유림의 한본산으로 등장하면서 한양에서까지 대갓집 제자들이 공부하러 몰려드는 등 성황을 이루기도 했었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충열서원이 헐리면서 능원리는 다시 원래의 한촌으로 돌아갔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빈한하게 살아 큰 벼슬도 못했고 출세한 사람도 없지만 인근에서는 양반동네로 알아주지요. 이웃 마을하고는 동네분위기나 말쓰는 투부터가 다르다는 얘기도 듣습니다.』
마을노인 상기씨(65)의 말 명지의 남은 향기는 5백여년 뒤 후손들에게도 감화를 미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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