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야당, 대통령 탄핵안 제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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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25일 의회에서 국정연설을 하는 동안 여당 의원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다. 아로요 대통령은 이날 정치적 안정을 위해 의원내각제로 개헌하자고 촉구했다. [마닐라 AP=연합뉴스]

필리핀 야당 의원들이 25일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아로요 대통령은 이날 오후 의회에서 가진 국정연설에서 정치개혁을 촉구했다. 정국돌파를 위해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됐다. 필리핀이 '탄핵과 개헌 정국'을 맞아 혼란에 휩싸이게 됐다. 그러나 많은 해외 투자가는 필리핀 경제정책이 표류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 탄핵안 제출 경위=아로요가 지난해 대선에서 개표 종료 전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과 통화한 내용을 도청한 테이프가 지난 6월 야당에 의해 공개됐다. 아로요로 보이는 여성이 "안정적인 표를 확보해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야당은 "아로요가 선거 부정에 개입한 것"이라며 사임을 요구했다. 아로요는 "개표 도중 선관위원장에게 전화한 것은 부적절했다"고 공개사과했다. 그러나 "공정하게 승리했다"며 사임 요구는 거부했다. 야당은 이에 맞서 지난달부터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주도해 왔다. 아로요의 가족들이 도박 관련 기업 등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도 드러났다.

탄핵안이 통과되기 위해선 하원 의원 236명 가운데 3분의 1(79명) 이상이 동의한 뒤 상원 의원 23명 중 3분의 2가 찬성해야 한다. 그러나 현지 언론들은 "여당이 상하원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어 하원에서의 통과도 어렵다"고 예상했다. 그럼에도 야당이 탄핵안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반(反) 아로요 여론을 확산시키려는 의도인 것으로 분석됐다.

◆ 정치 개혁 요구=아로요는 25일 국정연설에서 "우리 정치 체제는 국가 발전의 저해요인이 됐다. 비효율적인 정치체제를 바꿀 시간이 왔다. 그것은 빠를수록 좋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로요는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CNN 등 언론들이 보도했다. 하원 대변인인 조셉 드 베네치아는 "일본.인도.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 아시아에서 성공한 국가는 의원내각제인 반면 대통령제인 인도네시아.필리핀은 시들시들하다"고 말했다.

AFP통신 등은 "아로요 대통령의 정치 개혁 요구는 개헌 관리를 내세워 정권을 연장하고, 내각제 선호 세력의 지지를 얻어 야당과 반정부 시위대의 사임 요구를 희석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 찬.반 아로요 세력=시장과 지방자치단체장의 모임,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큰 가톨릭, 군부와 경찰은 아로요 지지를 선언한 바 있다. 군부는 24일 마닐라 시내에 가장 높은 경계 수준인 적색 경보를 내렸다.

25일에는 아로요 대통령의 국회 연설에 앞서 1000명의 군인을 의회 주변에 배치하고, 2000명에게 대기명령을 내렸다. 필리핀 경찰은 6000명을 의회 주변에 배치, 반 아로요 시위대가 의회 3km 이내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했다. 아로요 사임을 요구하는 시민 4만여 명이 이날 의회 주변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1986년 마르코스 대통령과 2001년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던 '피플 파워'에는 아직 못 미친다"는 것이 필리핀 국내외 언론들의 분석이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로 아로요의 지지도는 떨어지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펄스 아시아'는 24일 "18세 이상 유권자 1200명을 면접조사한 결과 52%가 아로요 대통령의 사임에 찬성했고, 아로요가 최근 필리핀 대통령 5명 가운데 가장 무능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오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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