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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도청 테이프 정보 공개 사생활 보호냐 알 권리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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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노무현 대통령은 25일 "불법 도청으로 만들어진 정보는 공개도 불법이라는 것과 불법으로 취득한 정보라도 공익을 위해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공개되지 않은 그 이외의 다른 범죄 행위(테이프)와 형평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의 논리가 있다"고도 했다. 사건의 성격을 "정부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국가 기관의 불법 행위"라고 규정하면서도 우리 사회에 깊이 생각해봐야 할 화두를 던진 셈이다. 국가 기관의 불법 행위로 얻어진 정보를 언론이 공익의 이름으로 공개하는 건 옳은 태도인가, 잘못된 일인가. 아직 공개되지 않은 다른 도청 테이프와의 형평성 문제는 어떤가. 학계.법조계.정계 인사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들어보았다.

수백개 더 있다는데 … 특정인 것만 부각 문제 -박준선 변호사

청와대 대변인이 말한 대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기관의 불법 도청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다. 수사기관이나 국정원이 전력을 다해야 할 부분도 그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불법 도청된 자료 중에 들어 있는 일부 내용으로 관심의 초점이 옮겨지면서 논의가 변질됐다. 일부 언론사들이 자극적인 보도에 치우쳐 여론이 그쪽으로 쏠려 있다. 공개되지 않은 다른 도청 테이프가 수백 개라는 소문도 나도는데, 그중 홍석현 주미 대사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등에 대한 내용만 부각되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

다른 불법 도청 테이프 내용을 공개하는 것도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다른 범죄와의 형평성 등을 고려해서도 일반에 공개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통신비밀보호법으로 도.감청 및 도.감청 내용의 누설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도청 내용 공개에 내세우는 '공익'이라는 명분은 누가 정하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언론들이 무분별하게 회사의 입장에 따라 자기 입맛대로 도청 내용을 취사선택해 보도하는 것은 진실을 왜곡시킬 소지가 있으며 부작용이 더 크다. 공개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전화통화 내용을 몰래 녹음해 보도한 방송사에 대해 언론 자유가 우선이라고 본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얘기다. 도청 정보의 유출이 가져올 개인의 명예훼손 등의 피해 때문에 통신비밀법이 만들어진 것 아닌가. 한번 언론에 보도되고 나면 관련자들은 금전적인 손해배상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된다.

이미 덮을 단계 지나 남은 테이프도 공개를 - 하창우 변호사

언론 보도로 촉발된 안기부 도청 사건은 이제 덮을 단계를 지났다. 이미 방송.신문을 통해 도청의 방법과 내용이 상당 부분 국민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불법 도.감청을 금지하는 통신비밀보호법을 만든 김영삼 대통령은 평소 자신이 도청의 최대 피해자라고 주장했었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또 공무원이 직무상 취득한 정보를 불법으로 유출한 국가정보 관리의 허점이 드러났다. 늦게나마 장기간에 걸쳐 통비법을 위반해 불법 정보를 취득한 관련 당사자들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려면 검찰의 공정한 수사가 필수적이다. 공소시효가 지났거나, 이미 오래전에 벌어진 일이라는 이유로 없던 일로 치부해선 안 된다. 진상을 규명해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계기가 돼야 한다.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 경우 국민 모두가 국가 권력에 의한 도청의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미공개된 다른 도청 테이프들도 공개돼야 한다. 그것이 진실 규명을 위한 첫걸음이다. 다만 현행처럼 도청 테이프를 가진 쪽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흘리는 방식은 곤란한다. 따라서 검찰은 우선적으로 도청 테이프들을 증거물로 압수해야 한다. 이후 공정한 수사를 거쳐 테이프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 물론 현행 통비법상 도청된 자료를 공개하는 것은 불법이다. 또 도청 내용이 공개될 경우 당사자들의 명예가 훼손될 여지도 있다. 그러나 현행법 위반 문제나 명예훼손 때문에 중대 사안에 대해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도청은 야만, 공개는 위법- 김재원 한나라 의원

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는 기본적인 자유권이다. 누구든지 사생활은 보호받아야 한다. 불법 도청은 인간의 존엄성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것으로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 도청 파문에서 보았듯이 도청된 내용이 일단 공개되고 나면 다시 주워담을 수 없으며 당사자는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된다. 국가 권력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도청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국민의 인권 신장을 위해 존재하는 정부가 사생활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감독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도청은 되풀이돼서는 안 되는 야만적인 행위다. 국가 기관은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면서 정보를 얻는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이 같은 이유 등으로 국가 기관에 의한 도청 행위를 가중처벌하는 방안을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도청과 관련된 공무원이 공직을 유지하는 한 공소시효를 정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도청한 테이프가 더 있다고 한다. 국정원이 본격적으로 수사하면 이들 테이프의 존재 여부가 밝혀질 것이지만 테이프가 있다고 해서 이를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도청된 것을 공개하는 것 자체가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미국의 법 이론 가운데 독수과실(毒樹果實) 이론이 있다. 독이 있는 나무에서는 독이 든 과일이 열린다는 뜻이다. 위법한 절차에 의해 획득한 증거는 법원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이런 법 이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테이프를 공개해 또 다른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의 잘못 밝혀낼 기회 - 우원식 열린우리 의원

국가기관인 안기부가 개인의 사생활을 도청한 것은 명백한 불법이다. 도청에 관련된 사람은 처벌받아 마땅하다. 과거 안기부 직원이 퇴직할 때 도청한 테이프를 갖고 나온 것 역시 불법이다. 그런데도 처벌이라는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고 테이프가 시중에 흘러나왔다. 이 테이프는 다시 몇 단계를 거쳐 한 방송국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방송국이 테이프를 입수하는 과정에서의 불법행위는 현재까지 드러난 것이 없다.

사생활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도청된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이 공인이 아니고, 내용 또한 개인적인 것이라면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성격이 다르다. 공적인 인물과 관련된 사안이고 내용 또한 사생활 보호 차원을 넘어서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불법으로 취득한 정보라 하더라도 공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공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사생활 보호라는 개인의 법익과 국민의 알 권리라는 공공의 법익이 충돌할 때 어느 것을 앞세워야 할까.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보호할 때 생기는 이익의 크기를 비교해 이익이 큰 쪽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또 다른 도청 테이프들이다. 적게는 수백 개, 많게는 수천 개가 있다고 들린다. 과거 불법적으로 도청이 이뤄졌다 하더라도 그 속에 공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면 그냥 덮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진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기회에 과거의 잘못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불법적 사안 쟁점화 안돼 - 양무진 교수

이른바 '이상호 X파일'이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언론에 의한 무차별 폭로전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불법적인 수단과 방법에 의해 탄생한 도청 테이프가 논란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공익이라는 얼굴로) 불법이 정당화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민주주의 사회에선 결과 못지않게 원인과 절차도 중요하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이요 정신이다. 그런데 요즘 문제되고 있는 불법 도청 테이프는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이 부당한 방법으로 기록된 것이다. 내용의 진위 여부를 떠나 결코 정당화돼서는 안 되는 사안이다. 공공기관, 특히 권력기관이 불법 도청을 자행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렇게 근본적으로 원인 불법인 사안을 쟁점화시켜 그 사실관계를 따지는 건 옳지 않다. 이런 식으로 불법이 합리화되면 민주주의 제도는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국가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독 나무에서는 독 열매가 열리게 마련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여론몰이에 나서는 언론들도 깊이 반성해야 한다. 언론이 앞장서 불법적 사안을 대대적으로 공개하고 보도하는 건 적절치 않다. 여기서 다들 멈춰야 할 때다.

일부에선 형평성 문제를 들기도 한다. 문제된 건 빙산의 일각이므로 다 공개하자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의견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테이프의 무차별 공개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어차피 부당한 사안 아닌가. 더 이상 불법적인 사안을 정당화하지 말고 논의를 종식하자. 그것이 국가와 사회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결론이 될 것이다.

(경남대.정치외교학)

보도는 하되 한계 지켜야 -이재진 교수

불법 도청과 신분 사칭 등 취재의 수단.방법이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적이면 이를 삼가는 게 언론 윤리의 기본이다. 그러나 취재로 얻은 내용이 국민이 알아야 할 중요 사안일 경우 이를 보도하는 것 또한 언론의 기본 임무다. 이를 가늠하는 계량화된 법칙은 없다. 언론 보도로 개인의 명예나 프라이버시(privacy)가 침해될 경우 공공의 이익이라는 가치와 '비교 형량'을 따져 판단하는 게 선진국의 판례다. 언론의 자유와 개인의 법익 사이에 가치를 비교해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X파일'의 경우 보도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용의 성격이나 정치적 측면 등 어느 것을 따지더라도 국민 '알 권리'의 성격이 강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당사자들이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21일 법원이 방송을 금지하지 않은 것도 이를 반영한 것이다. 다만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있는 내용에 대해서만 방송을 금지했을 뿐이다.

'X파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생활은 내용상 사생활 보호대상이라기보다는 국민이 알아야 할 중대사 쪽에 가깝다. 따라서 언론이 이를 추적 보도하는 건 그 기본 역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한계는 존재한다. 무차별적인 폭로가 우선시돼 공공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언론 보도는 자제해야 한다. 공개되지 않은 다른 테이프와 공개된 것 간의 형평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안별로 판단하되 공익과의 형평성 문제가 우선적 기준이 돼야 할 것이다. 무분별한 보도보다는 이번 사건이 공공의 이익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언론인들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다.

(한양대.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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