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길 텄으나 타결은 유동적 한일 외상 동경 대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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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5일 열린 한일 외상 회담은 앞으로 경제협력 문제에 대해 실무자 회담을 포함한 각급 레벨의 협의를 계속키로 하는 한편 일본측이 상품차관에 대해 성의를 가지고 검토한다는 긍정적인 자세를 보인 것으로 그 성과를 요약할 수 있다. 이 같은 회담 결과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는 외상 회담을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한일 경협 교섭은 지난 4월 29일 「야나기야」(유곡겸개) 일 외무성 심의관이 방한한 이래 사실상 중단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회담은 이처럼 얼어붙었던 양국관계를 녹이고 대화 재개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범석 적극 외교」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신임 이범석 외무장관은 지난 6월 22일 「마에다」(전전리일) 주한 일본 대사를 불러 한국 측의 새로운 제안을 전달했다. 한국 측 제안의 정확한 내용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일본측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전체 경협 규모를 일본측이 주장해온 대로 40억 달러로 양보하고 다만 내용을 정부차관 23억 달러, 상품차관 17억 달러로 조정하자는 것으로 알려졌다.
「야나기야」를 통해 제시한 일본측 안은 정부차관 15억 달러, 수출입은행 융자 25억 달러였다.
한국 측의 새 제안 내용이 사실이라면 60억 달러 차관을 요구했던 한국 측으로서는 어려운 결단을 내린 것이며 교섭 타결을 위해 최대한의 성의를 보인 것이라는 점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이 장관이 이번 방미 귀국 길에 일본에 들른 것은 경협 타결을 통해 한일간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겠다는 비장한 결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한국 측의 성의에 비추어 볼 때 이 장관의 방일을 요청한 일본측이 이번 회담에서 상품차관에 대한 긍정적인 「검토」 정도의 미지근한 대답에 그쳤다는 것은 일본측의 불성실하고 오만한 자세를 드러낸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외상 회담 직전인 7월 1일 이상익 한일의원연맹 간사장과 만난 「사꾸라우찌」 일 외상은 이 장관과의 3차에 걸친 회담 스케줄(두 차례 회담과 만찬)에 대해 『그렇게 오래 만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전해져 한국외교 관계자들의 신경을 건드린 일이 있다.
이 같은 움직임으로 보아 이번 외상 회담으로 다시 시동이 걸리긴 했으나 앞으로의 경협 교섭이 일본측의 자세 전환이 없는 한 적지 않은 진통을 더 겪어야 할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일간의 지리·역사·문화·외교 등 특수 관계에 비추어 경협 교섭이 「어쨌든 타결돼야 할 전제」라고 본다면 이번 이 장관의 방일이 가장 가능성 높은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선 양측의 의견이 출발 당시에 비해 지근거리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 측이 총 규모 40억 달러 선을 제시한 것이 사실이라면 양국간에 전체 규모 면에서는 합의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이번 회담에서도 공식으로 이를 시인하는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전체 경협 규모에 이론이 있다는 얘기도 없었다.
규모 문제는 합의라는 절차 없이 기정 사실로 굳어진 것 같다.
둘째는 일본측이 한국이 요구한 상품차관에 대해 규모 면에서는 「검토」라는 꼬리를 남겨 놓고 있으나 상품차관 그 자체를 인정하느냐의 여부에 대해서는 이미 실무자선의 검토를 마치고 긍정적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일에는 외무·대장·통산·경제기획청 등 경협 관계 4개 부처의 관계 국장이 만나 상품차관을 인정한다는데 합의했으며(2일자 요미우리신문 보도) 2일에는 「기우찌」(목내소윤) 외무성 아시아 국장이 중의원 외무위에서 답변을 통해 『프로젝트와 관련된 내자조달용 상품차관이라면 이를 인정하지 못 할 바도 아니다』라는 정부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또 한국 측은 상품차관의 재원에 대해 정부차관(ODA) 아닌 수출입은행자금에 의한 상품차관이라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7월 5일 공노명 외무차관보) 일본측이 제시한 「ODA十수출입은행자금」이라는 경협 안에 상당히 접근하고 있다.
양측의 주장을 요약하면 결국 일본측은 ODA 15억 달러, 수출입은행자금 25억 달러 선을 내세운 데 비해 한국 측은 ODA 규모를 23억 달러로 늘리고 수출입은행자금을 17억 달러 선으로 줄이되 이를 상품차관으로 지원하라는 정도의 차이로 거리가 축소된다.
이번 회담에서 양측은 경협 문제의 조기타결 원칙에 합의하고 「사꾸라우찌」 일 외상이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전의 회담에서도 나왔던 것으로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번 회담에 참석했던 한국대표만이 이점을 새삼 강조하고 있는데는 타결을 위한 조건이 그만큼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일본측은 아직도 ODA를 얼마로 늘리겠다던가 수출입은행자금을 상품차관으로 지원하겠다는 명백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차관의 금리, 상환기간 등 조건에 대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가파른 고비는 넘겼다 하더라도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 측이 이처럼 성의를 보이고 있는데 일본측이 앞으로도 자기 주장만 고집한다면 경협 교섭, 나아가 한일관계의 재 구축이라는 과제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한 일본신문이 표현한대로 이 장관의 이번 방일은 2스트라이크 3볼에서 마지막으로 던지는 공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동경=신성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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