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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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대장장이, 방앗간, 목수, 정원사, 재단사, 수레꾼, 마부-.
서양사람의 이름에 비친 직업들이다. 「스미드」 「밀」 「카펜터」 「가드너」 「테일리」 「카터」 「마셜」.
실제로 유명인들 중에도 그런 이름을 가진 인물이 많다. 20세기가 낳은 최대의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글자의 뜻은 「돌쇠」(돌 하나)쯤 된다.
서양사람들이라고 「명」을 따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왕족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소박한 편이다. 일생을 두고 간수해야 할 명예의 상징치고는 너무 되는 대로다.
우리 나라 사람은 다르다. 이름에 살고 이름에 죽는다. 세상에 『가문을 더럽혔다』는 욕 이상의 것이 없다. 『이름을 더럽혔다』는 뜻이다.
우선 작명을 할 때도 얼마나 까다로운가. 항렬부터 따져야 한다. 금 목 수 화 토의 오행이나 간지(갑을, 자축…)를 본다. 문중에 따라서는 족보에 미리 항렬자를 정해 놓기도 한다.
기휘라고 해서 조상들의 이름자와 중복을 피하기도 한다.
때로는 항렬 말고도 자획을 따진다. 「33천 28숙」을 가리는 것이다. 주역의 세계. 이쯤 되면 「성명 철학」이다.
이밖에도 「자」가 있고 「호」도 따로 있다. 임금이 경신이나 유현에게 추증하는 「시」는 그 가문의 면면한 영광이다.
우리 나라의 족보문화에 감탄, 감탄하는 서양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지금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족보만 해도 3천 종에 이른다.
성씨도 원래 신라 법흥왕 무렵(6세기) 벼슬하는 사족에게만 주는 명예였다. 인격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처럼 이름을 떠받치는 우리가 언제부터 가명과 익명을 즐겨 썼는지 궁금하다. 필경 사단 많은 난세의 산물이 아닐까.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 부신은 바로 피해 망상을 낳는다.
도대체 이름을 밝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현직자들 뿐인 것 같다. 정작 이들도 대문의 문패만은 없다. 정체를 떳떳이 밝히는 일이 오히려 귀찮고 두려운 것이다. 한때는 승용차의 창까지 선탠을 하고 다녔다.
익명이나 가명의 풍조는 가까이는 일제시대에서 비롯된 것도 같다. 요즘은 경제가 지하로 잠복했었지만, 그 시절엔 사람과 그 사람의 이름이 지하에 숨어 있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역사가 어지러울수록 사람들은 대로보다는 소로를, 공명보다는 은둔 생활을 찾게 된다. 은행예금조차도 떳떳이 정체를 밝히길 공연히 두려워하는 경향이다. 물론 떳떳이 못한 돈을 맡길 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그런 돈이 엄청나다는 것은 알려진 비밀이다.
그러나 이제 가명의 시대는 끝났다. 누구나 실명시대. 문제는 「실명」을 제대로 간수할 수 있는 사회적 전제다. 공명정대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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