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은 평등하지 않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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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개인사업을 하며 중국 여성과 가정을 꾸린 임준수(35)씨는 곧 태어날 아이의 국적 선택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그는 "지난 여름 부부동반 여행을 준비하다 보니 중국 여권으로는 미국·유럽은 물론 일본·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지역에서도 비자를 받아야 하는 등 불편한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인간은 평등하다지만 여권은 그렇지 않다. 13일 이민 전문 글로벌 법무법인인 헨리&파트너스에 따르면 한국 여권으로 비자 없이 또는 도착 비자를 받아 여행할 수 있는 나라와 자치령은 전세계에서 172개국에 달한다. 미국·영국 등이 174개국으로 가장 많고, 캐나다와 덴마크가 173개국으로 그 다음이다. 한국은 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과 함께 3위권인 셈이다. 대부분의 EU 국가들과 호주·뉴질랜드 등이 170개국 안팎으로 우리나라보다 적다. 아시아 권에서는 싱가포르(170개국)·말레이시아(166개국) 등이 여행 자유도가 높은 편이다.

한국 여권은 여행 가능 국가 수로는 3위라지만 실질적인 활용도에서 최상급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유럽 국가들과 비자면제 협정을 많이 맺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을 제외하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자여권이 도입되기 전까지 범죄 조직에서 위조용으로 가장 선호하는 여권으로 꼽히기도 했다. 올 들어 러시아와 비자면제 협정이 발효되면서 한국은 주요 8개국(G8)을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됐다. 유럽에서도 벨로루시를 제외한 모든 국가를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다. 벨로루시는 북한 사람들이 무비자로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유럽 국가다. 미주에서도 한국 여권으로는 쿠바와 벨리즈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비자 또는 도착 비자로 입국이 가능하다. 이달 29일부터 카자흐스탄도 무비자 리스트에 추가된다.

무비자 제도는 국제 사회에서 해당 국가의 경제력을 반영한다. 입국 허가서인 비자 없이 방문을 허용해도 불법체류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또 대부분 상호 비자면제를 해주기 때문에 두 나라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최근 전쟁을 겪은 아프가니스탄(28개국)과 이라크(31개국)의 여행 자유도가 가장 떨어지는 이유다. 북한 역시 42개국으로 최하위권이다. 최근 경제력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급상승한 중국이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가 43개국에 불과하다. 그 동안 전세계가 중국인 불법 입국자들로 시달렸던 데다가 공산국가의 특성상 외국인의 중국 방문을 까다롭게 제한하기 때문이다.

김창우 기자 kcwsss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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