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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노조시대] <제1부> 2. 선거운동식 정책 남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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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2월 초 대통령직 인수위 사무실.

새 정부의 노동정책 방향을 두고 인수위원들과 방용석 노동부 장관 등이 노무현 당선자와 토론하는 자리였다. 인수위 측은 먼저 ▶비정규직 보호를 위해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적용하고 ▶산별교섭을 도입한다는 등의 노동정책을 내놓았다.

方장관의 비판이 조목조목 이어졌다.

"기업들이 중국의 저임 노동력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는데 인건비 부담을 높이면 어떻게 합니까. 회사가 어려워지면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격한 노사분규가 일어납니다. 노동문제는 경제와 함께 생각해야 하는데 인수위가 노동정책을 마치 노동운동이나 선거운동하듯 몰아치고 있습니다. "

섬유업체 노조위원장 출신인 方장관의 말에 인수위원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노동계 대선배인 方장관이 자신들을 지지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인수위원 출신의 청와대 노동참모는 "그때 方장관이 경제부처 장관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한달여 뒤인 3월 18일 정부 과천청사.

신임 권기홍 노동부 장관과 노동부 간부들은 대통령 보고자료에 方전장관이 반대했던 인수위의 정책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정부가 바뀌면 모두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두산중공업에 이은 대형 분규인 철도분규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정부는 파업 예고일 이틀 전인 4월 18일 불법 파업에 강경 대응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실제로는 노조의 요구사항을 대부분 들어줬다. 민영화 철회를 명문화한 것은 물론이고, 지난 정부에서 추진해 온 철도 공사화에 대해서도 모호하게 넘어갔다.

정부는 뒤늦게 "구조개혁은 강행한다"고 설명했지만, 그것도 뒤이어 나온 공공부문 민영화 재검토 방침으로 신뢰를 잃고 말았다.

이처럼 새 정부가 정책의 일관성을 떠나 친노동으로 기욺에 따라 자연 경제에 대한 고려가 약해진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權장관 스스로도 "노동부는 경제부처가 아니다"고 강조하고 있다.

정부가 노사문제를 경제 과제가 아닌 사회문제로 보고 있다는 일부의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여기에다 정치적 고려가 강하게 작용하고, 실속보다 포장에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표적 사례가 대통령직 인수위원들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위해 이슈화한 '동일노동.동일임금'이다. 한동안 논란이 일더니 지금은 '균등대우' 등으로 바꿔 불리고 있다. 처음부터 잘못 짚었다는 걸 새 정부 정책브레인(전 인수위원)들이 알게 된 것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경우 인수위가 이야기하다 본전도 못 건졌습니다. 이미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원리이므로 더 주장할 것이 없어요. 이를 잘 모르고 그럴 듯한 정치구호로 포장해 던진 것이지요. 평등의식을 자극해 귀에는 쏙 들어옵니다만…. "(노사정위의 한 위원)

노조에 신경 쓰며 선거운동식 노동정책을 펴다 보니 정작 중요한 대책에는 힘이 실리지 않는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요즘 특히 문제되고 있는 청년 실업문제가 그렇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5~29세의 청년실업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방식의 계산으로 이미 10%를 훌쩍 넘었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신호가 켜진 셈이다.

그러나 새 정부는 그리 다급해 보이지 않는다. 청와대의 한 고위 정책참모는 "현 정부의 정책엔 청년실업에 대한 비전 제시가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결국은 경기가 좋아져야 풀리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취업자인 노조원들에 대해서는 갖가지 정책을 쏟아내고 있으면서도 실업자인 청년들에겐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조는 '힘있는 정치세력'으로 커졌고 젊은층은 아직 정치세력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새 정부의 '세력균형론'도 결국엔 정치논리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얘기다.

◆다음회에는 '왜 우리의 파업은 길고 과격한가'를 다룹니다.

*** 중앙일보 특별취재팀

김정수 전문기자 (경제연구소), 남윤호 .김기찬.하현옥 기자(이상 정책사회부).강병철 기자(산업부)

<사진 설명 전문>
김세호 철도청장과 천환규 철도노조위원장이 지난 4월 20일 노사협상을 마치고 악수하고 있다. 구조개혁은 물 건너갔다는 여론비판이 나오는가 하면 정부 내에서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며 악수했는지 모르겠다는 평가가 나왔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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