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2)제77화 사각의 혈투 60년(47)|김영기|조성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조성구는 40세까지 권투생활을 계속한 국내 최 장수 복서중의 한 사람이다. 해방 후 아마권투의 미들급을 석권한 뒤 51년 피난 수도인 부산에서 프로로 전향, 8년 동안 중량급에서 활약하다 현역생활을 청산했다. 그는 완고한 모친(87·이범희)의 반대로 8·15해방 후에야 공식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으나 권투를 시작한 것은 훨씬 이전이었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부친을 잃고 12세 때인 1930년께 어머니를 따라 온 가족(2남2녀)이 상경했다. 그는 영창중을 다니게 되는데 이 2층 학교 건물의 아래층이 YMCA여서 이곳에서 권투를 배웠다. 이 같은 경우는 송방환과 너무나 똑같다. 그러나 조성구의 완고한 어머니는 권투는 깡패들이나 하는 운동이라며 무수히 야단을 쳤다. 그가 권투를 계속하자 어느 땐 어머니 이 여사는 그를 심지어 아궁이 속에까지 쳐 넣는 엄벌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대회 출전은 어림도 없는 처지여서 그는 44년 중국 봉 천으로 건너갔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그는 45년 9월5일 원효로 용산경찰서 옆에 용산 권투구락부를 서울에서 제일 먼저 개관, 관장 겸 사법으로 활약했다. 그는 구락부 운영으로 바쁘면서도 같은 해 9월 제1회 전 조선아마권투선수권대회에 출전, 미들급의 챔피언이 됐고 46, 47년에 열린 전국체육대회에서도 연이어 우승, 중량급의 강자로 군림했다. 46년 봄에 그는 프로모션에도 손을 대 자신의 도장 프로복서인 송방헌 최일태 김광수와 김광희 서재석 이일호 등과의 라이벌대전을 서울운동장 수영장에서 개최했다.
그러나 이 대회는 아마선수가 프로모터를 했다고 해서 말썽이 일어났으나 수도구락부(용산 구락부의 개명)주최라고 얼버무려 겨우 모면했다. 그는 48년 런던올림픽 선발전에서도 우승했으나 최종 대표명단에서 빠지자 아직도 이때의 충격이 컸던지『빽이 없어서 빠진 것이다』라고 아쉬워하고 있다. 그는 6·25사변 전까지 아마를 고수, 분주히 활동을 벌었다.
이 당시 서울에는 도장 외에도 각 학교를 중심으로 권투부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다.
배재중은 미션계통임을 이용하여 글러브 등 기구를 완벽히 갖춘 권투 부 도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당시 프로 권투 계의 거물들인 박형권 송방헌 김석장 김창환 등도 훈련을 위해 배재중 도장을 이용하기도 했다.
또 연희대는 권투부 대표에 박갑득(조선일보 박갑철 기자 장형), 사범에 박용진을 내세웠는데 부원으로 방우영 주상석 등 이 있었다.
고려대는 대표 박철용·사범 송방헌, 동국대는 대표 정용현·사범 노세열(노병렬 동생), 성균관대는 대표 권오영·사범 노병렬, 휘문중은 대표 홍삼·사범 노병렬 등 이 권투 부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조성구는 49년 서울운동장에서 아마선수로 은퇴경기를 갖고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려 했다. 그러나 6·25사변이 뜻하지 않게 그를 프로복서로 변신시켰다.
적치하의 지겹던 은신생활을 겪은 후 1·4후퇴 땐 아내와 애들은 처가가 있는 충남 조치원에 남겨 놓고 부산으로 피난했다. 고년 봄 그는 부산에서 프로에 데뷔, 신문호와 8회전을 가졌다. 그가 프로에 데뷔한 데엔 한가지 목적이 있었다. 1·4후퇴 때 서울운동장 앞에서 학도병으로 나간 동생 용구의 생사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대전은 대한청년단 경남지부 주최로 충무로 광장에서 열렸는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들도 권투보다 가족·친지들을 찾기 위해 이같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경기가 끝난 뒤 『조성구 아는 사람은 앞으로 나 오라』고 마이크로 방송했으나 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대구로 가서 공군문관으로 들어가 공군권투부률 창설, 10년 동안 재직하면서 많은 아마 선수들을 키워 낸다. 대구에선 공군 권투 부를 육성하면서 프로경기를 벌여 51년 6월 정복수와 대결했는데 정복수와는 서울수복 후 은퇴할 때까지 모두 10차례 라이벌 전을 벌여 마지막 단 두 차례만 이겼을 뿐 모두 패했다.
대구에서 조성구가 정복수와의 대전을 앞두고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한 군인이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이 일등병 군인이 대구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던 동생 용구였다. 포스터를 보고 동생이 찾아온 것이다. 52년 12월 초순 조성구는 박형권과의 대전을 자신이 주최했다.
그런데 이날 영하 17도의 맹 추위가 대구에 몰아닥쳐 유료 입장 8명을 기록함으로써 박에게 춘 대전료 등 많은 손해를 입기도 했다. 53년 수복과 함께 서울로 왔다. 정복수와는 링에서는 사생결단을 하면서도 두 주불사의 막역한 친구사이였다.
키도 조가 10cm이상 크고 권투스타일도 달랐지만 성격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경기 전날에도 같이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았지만 서로 눈치를 보면서 과음은 하지 않았다.
그는 현역에서 떠난 뒤 60년 4·19후 용 산에서 시의원에 출마해 3위로 낙선, 도장 등 많은 가산을 잃기도 했다. 65년 중앙정보 부 권투 부를 창설해 3년 동안 또다시 아마복싱을 육성했다.
조성구는 현재 서울 영등포구 신길 동에서 어머니 이범희 여사를 모시고 4대가 한 집안에서 화목하게 살며 노년을 즐기고 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