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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반민특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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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반 민족행위 처벌법은 국회의 숙제였다. 제헌국회는 정부수립을 위한 일련의 입법을 끝낸 뒤 반민 법 문제에 눈을 돌렸다. 48년 8월 5일 김웅진 의원 (파주·무)등은 「반민족행위 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구성 안을 긴급동의로 제안했다. 이 문제에 대해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이환(울릉군·무) 이성득 (개성·무) 배현태(거창·독촉) 등 의원은 <겨우 안정 돼 가는 사회를 다시 혼란에 빠뜨린다>는 이유로 법 제정을 반대했다.

<공개 반대는 못해>
그러나 국회내의 반대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한민당의 중진들은 내심으로는 가혹한 처벌법을 반대했지만 입법 그 자체마저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없었다. 결국 국회는 큰 논란 없이 제안자인 김웅진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반 민법기초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기초위원회는 과도 입법의원이 마련됐던 법안과 국회전문위원 안을 중심으로 검토해 1주일만에 법안을 완성했다.
해방 4년이 지났고 건국 초엔 사회적 안정이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해 입법의원이 만들었던 처벌법보다는 완화한 전문 3장 32조의 「반민족행위 처벌법」이었다.
이 법안의 본회의 심의에서 흐름은 두 갈래로 나타났다. 대체로 무소속과 대동청년단이 중심을 이룬 소장파는 준엄한 처벌을 주장했다. 반면 한민당, 그리고 신익회 의장의 국민당계는 온건한 태도였다. 물론 그 무렵의 반민 법에 대한 태도를 정파별로 구분하기는 어렵다.
이원홍 의원 같은 이는 한민당 이면서도 최고 사형까지를 주장했고 소장파 중에서도 사회혼란을 염려하는 의원도 있었다. 그런 흐름을 대표한 발언들.
▲이원홍 의원(합천·소장파)=제4조의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반형법에서도 살인범에 대해서는 사형을 선고하는데 애국 독립운동지사를 살상한 민족반역자를 처벌하는데 사형을 뺀 것은 너무 가벼운 처별이 아닌가.
또 개전의 정이 현저한 자는 그 형을 경감 또는 면제할 수 있다고 했는데 조국이 광복된 지금 잘못을 뉘우치지 앉는 자라고는 없을 테니 이 조항으로 인해 누구도 처벌할 수 없게 돼 법안은 공문화 되는 것이 아닌가.
▲김전연 의원 (영암·한민당)=전반적으로 처벌법은 관대해야 한다. 필리핀은 3∼4년 기간에 친일 협력자가 나왔는데도 대거 사면했고 만주와 중국본토에 반 민족행위자가 있었지만 장개석 주석은 그 죄를 묻지 않고 관대히 처리했다.
필리핀이라든지 중국을 보거나 또 우리 남한의 특수한 사정을 보거나 우리가 당면한 것은 지금 우리가 누구와 싸우지 않으면 안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를 반대하는 진영에 기회를 줄 염려가 있는 것을 생각해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다. 또 조사위원회라든지 특별 검찰부 특별재판부니 해서 우리 국회가 간여한다면 남한이 바글바글 끓을 우려가 있다….
사실 법안은 그 해석에 따라 해당자가 광범하다는 것. 그리고 행정부와 사법부에 반 민법처리를 맡길 수 없다는 현실 때문에 이 법의 집행을 위한 조사와 검찰권·재판권을 국회가 주관한다는 것 등은 문제조항들이었다.
국회 심의가 진행되는 동안 반대운동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웅진 의원을 비롯한 법안 제안 의원들에게는 『▲대통령은 민족의 신성이다. 절대 순응하라 ▲민족을 분열하는 반민족 처벌법안을 철회하라 ▲민족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앞잡이다. 인민은 여기에 속지말고 가면의원을 타도하라 ▲한인은 지금 뭉쳐야 한다. -대한민국 30년 8윌 23일 행동위원 일동-』이란 협박장이 날아들기도 하고 같은 내용의 전단이나 벽보가 시내에 뿌려지기도 했다.

<찬반 성명전도>
8월 27일 정부 내 친일고관숙청특위 위원장 김인식 의원의 발언도중에는 대혁청년당원 2명이 원내에서 소란을 피웠다. 한 명이『집어 치워라. 반 민족처단 법은 시기상조다. 너희들도 친일파가 아니냐』며 고함을 치고 본회의장으로 뛰어내리려다 국회경위에 의해 체포되자 또 다른 청년이 고함을 치며 비라를 뿌리고 윗도리를 의원 석으로 던졌다.
반 민법 제정을 적극 지지하는 신문·사회단체·청년단체 등의 성명서도 쏟아져 나왔다. 국회 비라 사건이 있은 이틀 뒤인 29일 국회의원 숙소인 서울호텔에 대한의혈대 명의로<민주국가에서 국회는 신성하다. 국회 방청석에서 국회를 모독하는 악한이 있었다. 민족의 수치요, 국가의 체면이 보다더 훼손됨이 없다. 민족정기 없이 조국재건이 없음을 알라> 라는 비라가 배달되기도 했다. 이런 소요 속에서 기초위 부위원장 김상돈 의원은<일부 청년단체가 실업인들로부터 1억원의 돈을 받아 「대지구락부」라는 조직을 만들어 반 민법 반대운동을 펴고 있고 그 쪽과 연결된 신문사도 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회의 법안 심의과정의 반대 등 소요는 가벼운 단막극일 뿐 심각한 사태는 아니었다. 제헌의원이던 김영기씨도『반 민법은 그 결과 때문에 심의 때부터 사회가 시끄러웠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이상하리 만큼 국회심의는 순조롭고 순탄했어요』라고 회고했다.
실상 문제는 정부였다. 미군정 3년을 거치는 사이 어느새 친일관료가 행정의 중추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좌익의 테러활동을 막아 광복 후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극복해낸 수사기관의 실무지주는 일제하에서 훈련된 경찰들이었다.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 역시 친일파가 그 중심권에 자리해 있었다. 한동안 움츠려있던 경제력 있는 친일 기업인들은 건국준비 과정에서 기반을 확대했다.
청년단을 포함해서 우파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하고 더러는 우파 조직의 막후인물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새 정부로서는 친일파 숙청에 손쓸 수 없었다. 행정의 기틀을 새우는데 있어선 기술관료를 필요로 했다. 민생문제를 해결하고 산업화라는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규모는 작지만 일제하에서 기반을 닦아온 극소수의 한국계 기업인을 보호 육성해야 했다. 정부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좌익의 도전을 막아내는 일이었고 이를 위해 사회적 중심세력권을 재빨리 형성해야 했다.
국회와 정부의 이런 입장의 차이는 처음부터 뚜렷이 나타났다. 국회는 경부의 친일파 요직 기용을 문제삼았다. 김인식·이재형 의원 등은 정부수립 나흘만인 8월 19일「정부 내 친일파 숙청에 관한 건의안」을 긴급동의로 제안했다. 건의안은 국무위원·차관 등 고위직에 친일파가 기용됐으니 이를 조사해 축출하라는 것이었다. 이 건의는 바로 채택돼 정부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처음 이를 묵살하려다 국회 압력이 커지자 유진오 법제처장에게 정부 내 친일파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대통령의 결정은 국회의 큰 반발을 샀다. 국회는 민희식 교통장관, 윤석귀 체신장관, 유 법제처장, 임문환 상공차관을 친일파로 지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국회는 정부에 맡길 수 없다해서 제안자인 김인식 의원 등으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윤 체신은 무고>
조사결과 민 교통장관은 조선어 폐지를 반대한 학부모를 경찰에 고발한 42년의 교동 국민학교 사건의 당사자임을 밝혀냈으나 윤 체신장관에 대한 것은 서우석 의원(곡성·한민)의 무고로 밝혀져 국회에서 말썽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국회는 조사보고서를 접수했지만 법의 뒷받침이 없는 문서였고 정부도 이를 묵살해 흐지부지 넘어갔다.
국회가 반민법 심의를 끝내가던 9월 3일 이 대통령도 담화를 통해 처음으로 정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문제로 많은 사람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처리가 안되고 나라에 손해 될 뿐이다. 모두 심사숙고해서 우선은 정부의 위신이 내외에 확립되도록 힘쓸 일이다. 무익한 언론으로 인신공격을 일삼지 말고 친일파 처리는 민심이 복종할만한 경우를 마련해 조용하고 신속히 판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라는 요지.

<친일파를 중용>
친일파에 대한 최소선의 처별이었다. 그러나 국회는 정부입장이나 미군정 3년의 환경변화라는 현실보다는 명분을 쫓았다. 이리하여 9윌 7일 기초위원회 안에서 거의 수정됨이 없는 반민처벌법을 통과시켰다. 제헌의원이던 장홍염씨의 회고.
『대의명분상 반민법이 통과돼도 시행은 의문스러웠다.
이 박사는 친일파를 중용했고 친일파는 자구책으로 이 박사를 둘러쌌다. 국회에서도 허정 김준연 홍생하씨 등 일부 한민당 중진들은 친일파 처리에서 이 대통령의 입장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나는 국회에서도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반민법이 재대로 시행될지 의심스럽다는 발언도 했었다.』
그러나 문제는 더욱 깊은데 있었다. 해외 망명그룹과 국내 민족진영의 국일관 파티에서 벌였던 다음과 같은 친일논쟁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김규식·신익희·조소앙씨 등 해외파-<지금까지 국내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서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 그런 과거는 모두 잊어버리고 건국에 협력하자>. 송진우·장덕수·조병왕 등 국내파-<당신네들 해외에서 헛고생을 했군.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했는지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국외에서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것 아닌가. 국내투쟁이 국외 활동보다 얼마나 험난했는가를 알아야지. 국내 숙청 같은 건 급할 게 없으니 임시정부 내 집안단속들이나 잘 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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