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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국정의 본산「세종로 1번지」34년…명감했던 주역들은 증언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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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반민법 파동은 건국 초의 가장 불행했던 정치사건이다. 민족에 대한 반역행위를 다스린다는 것은 광복이 가져다준 당위였다. 그럼에도 반민법 시행 1년은 줄곧 격동으로 지샜다. 명분과 현실간의 엄청난 거리가 빚은 갈등이었다. 이 과정에서 법의 존엄성은 유린당하고 민족의 긍지는 손상됐다. 그리고 끝내 이 사태는 새나라가 세워야 할 질서를 헝클어 놓는 정치 혼란의 전주가 되고 말았다.
49년1월8일 하오4시30분 반민족 행위 특별조사 위원회는 친일파의 거두로 지목받고 있던 화신산업 사장 박흥식씨를 체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했다. 8·15 광복으로부터 3년4개월 만에야 착수되는 친일파 검거 제1호였다. 박씨는 48년10월 반민법이 공포되자 외무부에서 여권을 발급 받아 미국에의 도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반민특위는 조사기관 조직이 끝나자 바로 박씨의 사무실을 급습한 것이다.

<미국 도피를 계획>
박씨는 형무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할말은 없소. 단지 나는 반민법 제1호 해당자부터 차례로 검거될 줄 알았는데 내가 맨 먼저 검거되었구료. 내가 도피하려 했다고 보도한 언론기관들이 원망스럽소. 나는 반민법 자체에 이의가 없소. 다만 공정한 처단만 바라고 있소. 내가 재일 먼저 검거된 원인을 생각해보면 백화점·연쇄점 등으로 너무 유명했던 탓이니 누구를 나무랄 수도 없소. 그렇다고 반민족 행위사실이 없다는 것은 아니오. 조선 비행기 회사를 운영했으니 제4조에 걸린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이다.』 체포 제1호를 박씨로 선택한데 대해 위원장 김상덕 의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박을 먼저 체포한 것은 외국으로 도망가려 한다는 정보가 있었을 뿐 아니라 반민법 집행을 방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박은 누구나가 손꼽는 친일과의 거두인대 이런 자에게 여권을 발급한 것은 외무부의 무책임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앞으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고 또 누구도 우리를 간섭할 권한이 없다고 본다.
김 위원장의 이같은 발언은 그 무렵 반민특위를 둘러싼 짙은 그늘과 그로 인한 파란을 예후하고 있었다. 실제로 박씨의 친일 행위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44년 안양에 조선 비행기회사를 설립한 행위는「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장을 책임경영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등에 처한다」는 반민법 4조7항에 해당되는 당연범이었다. 그럼에도 외무부는 그에게 여권을 내주었다는데서 정부의 반민법에 대한 부정적자세가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반민법에 대한 저항은 검거 2호에서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1월10일 반민특위의, 특별 경찰대는 극우파 신문으로 손꼽히던 대한일보 사장실을 급습했다. 체포대상은 S신문사의 사장 이종형씨.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부 출신인 이씨는 3·1운동 때는 항일운동에 나서 9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출옥 후 만주로 건너간 그는 이곳에서 일본 관동군의 밀정이 되어 독립투사를 색출, 처형한 인물이었다. 그는 광복 후 서울에 나타나「과거의 과오를 잊어버리자」는 강령을 내건 민중당 총무부 책임위원을 맡아 반공투사로 자처하고 나섰다.
그는 대동신문(뒷날 대한, 그리고 또 얼마 뒤 대동으로 제호를 바꿈)을 설립해 미군정 하에서 반공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다 반민법이 국회에서 심의되자「반민법은 망민법」이라는 제하의 사실을 통해 매국노의 앞잡이인 회색 국회의원을 숙청하라고 공격했다. 그는 청년단 주최 반공대회 등 공개적인 반민법 반대운동 의에도 테러단을 조직해 반민법 제정에 앞장서 있던 소장파의원 제거공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는 사무실로 특경 대원들이 들이닥치자 권총을 빼들고 대원들을 협박했다.
구속영장을 제시하자 그는『뭣이…나룰 체포해. 반민법이란 걸 만들어 떠들어대는 놈들을 내가 먼저 처치한다』고 대들었다. 결국 이런 저항을 예상해 수십명이 포위급습을 했기 때문에 그는 체포당했지만 특경대에 연행되어 와서도『나는 애국자다. 공산당을 때려잡은 나를 친일파로 몰아 잡다니…내가 풀려나는 날 빨갱이 회색분자를 모조리 토벌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호언이 한낱 허세가 아니라 실제로 힘을 배경으로 한 위협이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왕족 이기용 체포>
그렇지만 반민 특위 활동은 두 사람의 어려운 체포 후엔 일단 순풍의 항해를 했다. 13일엔 총독부 자문 귀족원에 해당하는 중추원 참의로 일본 군대에 비행기를 헌납한 방의석씨. 그리고 3·1독립 운동 때의 33인의 한사람이었다가 절개를 굽힌 최린씨를 체포했다.
l8일에는 일제 경찰의 경시출신으로 충남지사·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며 이른바 조선인의 황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이성근씨, 21일에는 중추원. 참의 및 경성(현 서울) 주재 만주국 총영사였던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씨, 그리고 아사히신문 경성지국 기자로 친일운동에 극성스러웠던 정국을, 31일에는 중추원 참의 조선신문사장을 지낸 문명기씨를 체포, 수감했다.
문씨는 자기 이름을 붙인 비행기를 헌납하고 1군1기 운동을 벌인 것이 반민족 행위 내용이었다. 왕족으로는 고종 황제의 당질 이기용이 체포1호.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던 그는 1윌10일 조사관이 체포하러 왔을 때까지도 응접실에 「히로히또」일본 천황의 사진을 걸어놓고 일본 황실로부터 받은 30여개의 훈장을 자랑스레 진열해놓고 있어 더할 수 없는 슬픈 인상을 준 인물이었다.
반민특위는 2차 검거에서 문화계로 손을 뻗어 2월7일에는 이광수·최남선씨를 체포했다. 서울 세검정에서 반민특위 조사관 서정욱씨에게 체포된 이씨는『자수를 못한 것은 내가 비겁한 탓인가 봅니다』라고 고개를 떨구며『가기 전에 책이나 정리해 놓아야겠으니 좀 기다려 달라』고 했다.
폐결핵을 앓고 있던 그는 요양이란 구실로 봉원사·사능 등지로 숨어 다니다가 이곳 세검정에 은신해 집필중이었다. 같은 날 우이동 자택에서 체포된 최남선씨 역시 외부와 교섭을 단절한채「조선역사 사전」을 집필하고 있었다.
이광수씨는 문학작품으로, 역사학자인 최씨는 독립선언문의 기초자로 한때는 민족의 지성으로 손꼽혔던 당대의 문필가고 제사였다.

<"고백서 쓰겠다">
이들 두 사람은 법 앞에 머리를 숙였지만 제나름의 변호를 글로 표시했다.
이광수씨에 대한 첫 취조.

<이름은?><이광수요><또><춘원이라는 호가 있습니다><또><없습니다><「가야마· 미쓰로」(향산광낭)는 누구인가?><일제 때 잠시 붙인 이름이지, 이광수가 틀림없습니다><일제 때 무슨 일을 했나><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고백서를 쓸까 합니다><쓰는 건 별도로 또 하더라도 대답을 해보시오><내가 친일한 것은 표면상 문제이고 나는 나대로 친일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한 것이외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감옥이 무서워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편하게 살아보고자 반역행위를 하게 되었다는 것인가><너무 할말이 많아서 말로 대답하기가 어렵소><할 말이 많다는 것은 저지른 죄가 많아 일일이 고백하기 어렵다는 뜻인가><…> 그는 체포이전에 그의 친일 행위를 변호하는 많은 글을 썼다. 작품「돌베개」잡지 삼천리에 게재한「나는 독립국가의 자유민」그리고「나의 고잭」이란 글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그는 마포 형무소 감방에서 1주일 넘게 꼬박 밤을 새우며 다시「나의 고백」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12월8일 대동아 전쟁이 일어나자 나는 조선민족이 일대위기에 있음을 느끼고 일부라도 일제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여 줌이 민족의 위기를 모면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기왕 버린 몸이니 이 기회에 희생되기를 스스로 결심했다』 고 썼다.
최남선씨도 역시 말로는 다할 수 없다면서 마포 형무소에서 밤을 새우며 자열서라는 고백서를 썼다.『조선사 편수위원 중추원장의 건국대학교 (만주) 교수 이것저것 구중중한 옷을 연방 갈아입으면서도 나의 일한 실제는 민족정신의 검토 조국역사의 건설 그것 밖에서 벗어진 일이 없음을 천일이 저기 있는 아래 명언하기를 꺼리지 않겠다.

<참회의 빛 역력>
그러나 또 나는 분명히 조선대중이 나에게 기대하는 점은 어떤 경우이고 청고한 지조와 강렬한 기백을 지켜서 의사로서의 모범이 되어 달라는 상식적 기대임에도 이를 위반했다. 내가 변절한 대목 즉 지조냐 학문이냐의 양자 중일 때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았다.
대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 시작하여 나오는 것을 내가 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임도 내가 잘 안다…까마득하던 조국의 광복이 뜻밖에 얼른 실현하여 이제 민족정기의 호령이 이 강산을 뒤흔드니 누가 이 앞에 숙연히 옷소매를 바로 하지 않으랴. 하물며 잘못이 있는 자로서야 오직 공손히 이 법의 처단에 모든 것을 맡겨 국민 대중 앞에 충정의 표시를 삼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33인중의 변절자로 지목된 최린씨 역시 참회를 나타냈다. 그의 정치사상을 질문 받고 『특별한 이상이야 없지만 첫 단계는 독립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둘째 단계 일제의 만주침략에 이르러선 민족보건을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의 동태를 살피고 멀지않아 동양에 변동이 올 것을 생각하고 고민 끝에 할 수 있는 대로 민족의 보전을 더 소중히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죄를 진 나같은 놈은 이게 죽어도 한이 없다. 여하간 과거에 지낸 일을 지금와서 생각하면 다 과오라 생각한다』고 심문을 괴로와했다.
반민 특위는 존엄한 자세였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런 준엄을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 밀러와 있었고 또 밀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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