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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여자에게 웃음을 주려는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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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형경
소설가

나는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 열혈 시청자다. “아이고, 의미 없다” 같은 대사가 일상에서 문득 튀어나올 정도로 깊숙이 개그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몸과 마음이 이완되는 유쾌함 속에서 코미디를 보다가도 문득 프로그램 제작자들의 긴장감은 어느 정도일까 짚어보게 된다. 매주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그것을 무대 위에서 표현하여, 적절한 순간 관객의 반향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면 수행하기 힘든 과제처럼 보인다.

  한 개인의 정신 형성에 성장기 부모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다. 가족 내에서 자녀들이 부모 환경에 맞추어 특정한 역할을 떠맡는다는 사실도 연구되어 있다. 가령 어떤 아이들은 가족의 구원자 영웅 역할을 자처한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출세해서 온 가족을 가난이나 불행으로부터 구제하겠다는 소망을 품은 채 성장한다. 엄마의 남편 역할을 떠맡는 아이도 있다. 그런 아이는 남편의 관심이 적다는 이유로 외로움을 토로하는 엄마의 쇼핑에 동행하고 가사 노동을 돕는다. 실제로 한 여성이 “엄마의 남편이 되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아이는 집안의 희생자 역할을 떠맡는다. 훌륭한 부모와 모범생인 형제 사이에서 유독 말썽꾸러기 반항아가 되는 아이가 있다. 그는 가족 구성원이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부정적 감정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희생자 왕따 역할을 떠안은 셈이다. 또 어떤 아이는 가족의 마스코트나 어릿광대 역할을 맡는다. 우울하거나 슬픈 엄마, 긴장과 갈등 상태인 집안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가족을 웃게 하고자 애쓴다. 부모가 웃고 집안에 평화가 유지된다면 자기를 망가뜨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예전 개그맨들이 바보 분장을 한 채 넘어지고 미끄러지면서 웃음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처음부터 남을 웃기는 재능을 타고나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의 재능 역시 성격이나 성향처럼 부모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선택한 생존법일 뿐이다. 아이가 스스로 역할을 떠맡기 전에 부모의 의식적·무의식적 요구가 먼저 있었음은 물론이다. 요즈음도 여자 마음을 얻기 위해 유머 감각을 익히거나 데이트에서 써먹을 농담 몇 가지 챙기는 남자를 본다. 만약 내게 소중한 사람이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 어릿광대짓을 한다면 오히려 마음 아플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을 것이다. ‘나를 웃게 해주는 남자’를 이상형으로 꼽는 여성들 앞에서 잘난 척한 점, 사과드린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