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는 "두발 규제" 학생은 "자율화" 사이에 낀 학교 "어떻게 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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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의 교육부 장관 등에 대한 두발 규제 시정권고로 "학생들의 머리는 짧고 단정해야 하며, 이를 어기면 교사가 자를 수도 있다"는 오랜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인권위의 시정권고는 법적 강제력은 없으나 시.도 교육청은 이미 두발 규제 개선을 일선 학교에 지시한 바 있어 두발 자율화가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그러나 서울 Y고교의 한 교사는 "개인적으로 인권위 권고에 공감하지만 교육적 측면도 생각해야 한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 학부모는 규제, 학생은 자율화 요구=두발과 관련해 학생과 학부모.교사 등 교육 세 주체의 입장은 각기 다르다. 학부모는 두발 자율화가 자녀들의 탈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걱정한다. 학생들은 '인권' 차원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편다. 일선 학교들은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서 부작용을 우려하며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서울 Y고교의 학생주임 김모 교사는 "머리가 길면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학생이 생길 수 있다"며 "학부모 항의를 어떻게 감당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서울 K중학교는 최근 두발과 관련한 학내 규정을 바꿨다. '앞머리는 눈썹까지, 뒷머리는 짧게. 성인형 머리와 염색 및 삭발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염색.파마를 제외한 전면 자율화'로 개정했다. 이 학교의 설문조사에서 학부모의 70%와 교사의 75%는 두발 제한에 찬성했지만, 학생의 80%는 완전 자율화를 요구했다. 서울의 사립 E고교는 학칙 개정에 대해 학생회와 논의 중이다. E고교는 현재 '여학생은 귀밑 5cm, 남학생은 짧은 스포츠형'으로 두발을 규제한다. 이 학교의 한 교사는 "5년 전 두발 제한이 거의 없던 시기에 불량학생들이 늘어 학교 이미지가 실추됐다"며 "요즘은 엄한 규정을 선호하는 학부모들이 자녀를 우리 학교에 일부러 보낸다"고 지적했다. 두발 규정을 완화할 경우 학부모들의 반발이 걱정된다는 것이다. 일선 학교의 교사들은 교육 당국에도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서울 Y고교의 학생주임은 "두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교육청은 학생 의견을 반영하라는 지침만 내리면 끝이다. 교육청이 구체적인 규정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 학생들 후속 조치 기대=교육청의 두발 규제 완화 방침 이후에도 일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두발제한폐지 운동을 벌이고 있는 청소년 포털사이트 '아이두넷'에는 "교육청 지침이 지켜지고 있지 않다"는 불만과 항의의 글이 줄을 잇고 있다. 서울 B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앞머리는 눈썹에 약간 닿을 정도'를 '앞머리는 눈을 찌르지 않을 정도'로 바꿨다. 도대체 뭐가 달라진 건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 많은 학생은 교육청의 지침에 이어 인권위 권고가 말로만 끝날 수 있다며 일선 학교에서 두발 자율화가 강력하게 적용되도록 하는 후속조치가 필요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홍주희.권호 기자

학생들 '강제 이발' 인권위에 진정
시정권고 나오기까지

일선 중.고교에선 학칙 등에 근거해 학생들의 두발 길이와 모양을 획일적으로 규제해 왔다.

시.도 교육청이 5월 두발 문제에 학생의 의견을 반영하라는 지침을 일선 학교에 내려보냈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인권위는 학생의 진정으로 조사한 A공업고와 B고교에서는 두발 단속시 강제 이발 관행이 있었으며, C중학교에서는 여학생의 머리를 묶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교육인적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올해만 32개 중학교와 44개 고교에서 교사가 기계나 가위로 학생의 두발을 자른 사례가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인권위는 학생의 두발 제한은 ▶교육현장의 질서 유지를 위해 제한할 필요성이 인정되는 극히 한정적인 경우에 한해야 하며▶그 제한은 학생들의 자기결정권이 충분히 보장돼야 하며▶강제 이발의 재발 방지를 위해 적극적인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시정권고는 원하는 머리 모양을 하겠다는 학생들의 끊임없는 '투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와 권위주의 시대부터 내려온 두발 제한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은 2000년 조직화됐다. 당시 청소년 포털사이트 아이두넷이 '노 컷(No Cut) 운동'을 벌여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16만여 명의 학생이 서명에 동참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에 교육부는 학교 측의 강제 삭발 행위를 금지하고 염색이나 파마 등에 대한 규제도 학생.학부모와 협의를 통해 정하도록 했다. 하지만 강제 이발은 계속됐다. '아이두넷'은 지난 3월 서명운동을 재개했고 일부 학생은 두발 제한 문제를 인권위에 진정하기에 이르렀다.

임장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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