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대통령과 남 탓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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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인과관계는 참 어려운 개념이다. 자연현상에서도 정확한 원인-결과 관계를 찾기 어려운데 하물며 사회현상, 정치현상에서는 얼마나 어렵겠는가? 단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의할 확실한 인과관계의 정립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른다. 사회현상, 정치현상은 주관적으로 각자의 인식 속에 존재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과관계를 논하려면 대단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해야 하고 단언은 금물이다.

이 어려운 개념이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께 드리는 글'에 등장했다. 대통령은 윤광웅 국방부 장관을 해임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총기사건 등 일련의 군 기강 문제와 장관 간에 인과관계가 없음을 강조했다. 국방부 장관 사안만 거론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자신의 참모와 각료들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 자체를 뭉뚱그려 비판하며, 문책성 인사는 과학적 인과관계를 무시한 왕조시대적 사고에 기인한다고까지 말했다.

과학적 인과관계를 살핌으로써 애꿎은 장관이 문책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주장은 원칙상 지당하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명확한 인과관계에 대한 고민 없이 너무도 쉽게 특정 사람이나 집단에 모든 잘못을 돌리곤 한다. 남 탓하기로써 단기적으로는 심리적 만족감을 느끼고 그 '남'과 대척점에 있는 '우리'의 단합을 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환원주의적 탓하기는 당위적으로 정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정치상 쌍방 간 탓하기 악순환을 가져오고 이분법적 갈등을 심화시켜 결국 모든 사람을 패자로 만든다. 탓하기의 이런 폐해는 한국 정치사가 너무도 잘 예시해준다.

정치 사안을 논함에 있어 인과관계(그것도 과학적 인과관계)를 따져야 하고 억울한 희생양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재천명했다는 데서 이번 대통령 성명의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원칙에 부연하는 가운데 대통령 스스로 과연 과학적 인과관계를 살폈는지, 아니면 무조건의 남 탓하기에 빠졌는지 회의를 자아내게 하는 대목이 많다.

예를 들어 헌법에 규정된 국회의 각료해임건의권 자체를 문제시하며 그것이 국가에서 책임의 의미를 왜곡하고 정치적 용도로 남용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주장을 한다. 이 주장이 편리한 남 탓하기가 아닌 과학적 인과관계에 입각한 것이려면, 각료해임건의권을 없앨 때 국가 책임의 의미가 바로잡아지고 정부.여당에 대한 정치적 시비가 줄어야 한다. 과연 그럴까.

여소야대가 소신 있고 안정된 국정운영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호소는 더욱더 환원주의적 탓하기로 비친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이 반대하면 정부.여당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여대야소로 바뀔 경우 곧 국정운영이 원활해질까. 국민 여론, 시민사회의 압력,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 여당 정치인들의 의식과 행태, 국정운영의 제도화 정도 등 수많은 다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여소야대냐 여대야소냐의 정국 형태만 국정운영을 결정짓는 원인으로 지목한다면 그것이 과학적 인과관계일까. 우리는 잘하는데 야당이 발목을 잡기 때문이라고 탓을 돌리는 것은 아닐까.

인과적 추론에 입각한 명확한 책임소재의 규명과 상대방에 모든 잘못을 넘기는 탓하기를 구분하기란 모호할 수밖에 없다. 각자의 관점에 따라 완전히 반대일 수 있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 간의 관계는 극히 신중하게 논해야 한다. 물론 정치인이 학자처럼 말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일반대중에 다가가기 위해 분명하게 단언해야 할 필요성이 있긴 하지만, 정도 문제로서 오늘날 정치인들이 너무도 쉽게 자기만의 인과관계에 따라 남 탓하기를 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번 대통령의 '국민께 드리는 글'은 이런 생각을 하게 한 수많은 사례 중 하나다.

임성호 경희대 교수.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