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37. 건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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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지방 공연을 다니던 시절 극장의 배우 대기실에서 쉬고 있는 필자.

극장 주변에는 건달들이 있었다. 그래도 서울은 나았다. 그들 나름의 구역과 위계질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방은 좀 달랐다. 시시껄렁한 패거리가 몰려와 극장에서 돈을 뜯는 일이 종종 있었다. 단원들이 받는 출연료를 빼앗기도 하고, 입장료도 내지 않고 공연장을 들락거렸다.

대구에서 공연할 때였다. 가죽장갑을 낀 건달들이 분장실로 들이닥쳤다. "야, 예쁜데. 이름이 뭐야?" "허락도 받지 않고 공연해도 되는 거야?" 건달들은 여배우들을 못살게 굴며 억지를 부렸다. 목적은 뻔했다. 돈을 달라는 얘기였다.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젊었다.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건달들 중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을 찍었다. "너희, 혼나고 싶냐? 여기는 배우들 대기실이야. 지금 당장 나가. 안 나가면 그냥 두지 않겠어."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집중됐다. 건달들은 잠시 흠칫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보잘것 없는 내 덩치를 보자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말했다. "좋다. 나가자." 건달들은 극장 뒤 빈터로 나갔다. 나도 따라나섰다. 단원들이 앞을 막았다. "아니,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요?" "그냥 잘못했다고 빌어요. 더 큰 사고 나기 전에." 그럴 수가 없었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멈춘다면 여배우들 앞에서 내 위신이 말이 아니었다. 사실 나의 이런 행동에는 과시욕도 적잖이 깔려있었다. '일단 나가고 보자.' 그게 내 생각이었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왕년에 한가닥 하던 놈이니까." 그렇게 큰소리를 쳤다.

극장 뒤로 갔다. 단원은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빈터에서 건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여덟 명이었다. 일 대 팔. 나는 그때까지 남의 따귀 한번 때려본 적이 없었다. 여덟 명이나 되는 건달들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판사판이었다. 나는 두 팔로 얼굴을 감쌌다. 복싱 선수가 얼굴을 방어할 때처럼 말이다. 배우에게 얼굴은 생명이었다. 상처가 생기면 무대에도 설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건달들 앞으로 나아갔다.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 채 나는 말했다. "맘대로 한번 해봐." 건달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우두머리가 "껄껄껄"하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발길로 내 엉덩이를 두어 번 툭툭 쳤다. 그리고 "야, 가자!"라며 건달들을 데리고 돌아가 버렸다. 내 배짱에 손을 든 건지, 정확한 이유는 나도 알 길이 없었다.

나는 그길로 극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두 손을 탁탁 털었다. 단원들이 몰려왔다. "어떻게 됐어요?" "다친 데는 없어요?" 나는 점잖게 말했다. "이젠 까불지 못할 겁니다." 극단에 소문이 쫙 퍼졌다. "배삼룡이 한 주먹 한다는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후에도 지방 공연장에서 건달이 들이닥치면 단원들은 나를 찾았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도망다녀야 했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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