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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총리와 장관들|장수각료 남덕우씨 통산 11년반|최단명 총리 이윤영씨 13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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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수립초기 초대 이승만대통령이 중앙청에 집무실을 두고 이용한 2년을 빼고는 줄곧 중앙청의 주역은 국무총리였다.
자유당정권후기 약 5년반 동안 국무총리제도가 없었던 때를 제외하고 정부수립 이후 약 28년간 16명이 국무총리 또는 총리서리를 지냈다. 여기에 5·16군정기간 4명의 내각 수반을 합치면 1인지하의 현직을 지낸 자연인이 20명에 이른다.
열흘동안 권한대항
48년 정부수립 후 크게는 4개의 정권이, 과도기를 합치면 7개의 정권이 교체됐다. 그 과정에서 각부처의 책임자로 국무회의를 구성하는 장관 4백24명이 탄생했다. 국무총리까지 합치면 장관이상이 4백44명이 된다.
국무총리는 말할 것도 없고 장관자리만 해도 치국제세의 꿈을 안은 수많은 정치 및 관료지망생의 마음을 설FP게 하는 자리다.
가치서열이 정치를 정점으로 위계화 되어 권력이 행정부에 집중되어 가는 시대에선 장관이란 자리는 명예·권력과 함께 부마저도 좌우할 수 있는 자리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등용될 때는 기쁘지만 떠날 때는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는 게 장관을 지낸 여러 사람들의 소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웬만하면 젊어서보다는 나이가 들어 장관을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도 있다.
지난 l월3일 개각때 장관직사임서를 쓰기 위해 삼청동 총리공관에 남덕우총리팀의 퇴임각료들이 모인 일이 있다.
나이가 지긋한 장관일수록 『할일을 다 끝냈다』는 담담한 표정인 반면 젊은 장관들은 『벌써 물러나야 하는가』하는 아쉬움때문인지 상당히 초조해하는 것 같더라는 게 자리를 지켜봤던 관계자의 술회였다.
그렇게 떠나기 아쉬운 자리를 가장 길게 누렸던 사람은 누구일까.
장관이상자리에 가장 오래 머문 사람은 통산 11년6개월의 남덕우 전총리. 서강대교수를 지내다 69년10월 재무장관에 발탁된 이후 경제기획원장관·대통령경제담당특별보좌관을 거쳐 점시 쉰 뒤 국무총리를 역임하는 행운을 누렸다.
정권이 교체되면서도 계속 장관으로 재등용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허정씨는 이대통령치하에서 국무총리서리와 사회·교통부장관을 지냈고 4·19후에는 과정수반으로 국무총리와 대통령권한대행을 하면서 4개월 동안 과도정부를 이끌었다. 그의 장관이상 재임기간은 서울시장 기간을 빼고도 5년3개월.
김현철씨도 자유당 때 재무장관 두번에다 부흥부장관까지 지낸외에 5·l6후에는 경제기획원장과 내각수반을 지내 5임에 5년2개월을 기록했다. 백두진씨는 제1공화국에서 재무장관·총리에 이어 공화당정권에서 또다시 총리를 역임했고, 국회의장도 두번이나 지냈다.
역대국무총리 중 최장수 총리는 정일권씨로 재임 6년7개월, 그 다음이 김종필씨의 4년6개월, 최규하씨의 3년11개월로 이어지며 최씨는 10·26으로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8개월간 대통령을 지냈다.
그에 비해 두번 총리를 지낸 백두진씨는 통산 2년2개월, 장면씨는 통산 1년2개월밖에 되지 앓는다.
최단명 총리는 4·19후 과도정부를 끌꼴다가 제2공화국 헌법에 따라 총리로 된 허정씨로 2개월4일. 총리서리직까지 따지면 이윤형씨가 13일로 최단명이다.
6개월을 넘기지 못한 총리도 많다. 장면(첫번 임기)·장택상·변영태·최두선·백두진씨(두번째 임기)등 6명이고 신성모·이윤형·박충훈씨는 총리서리만 하다가 물러났다.
이중 박총리서리는 최규하대통령의 사임으로 열홀간 대통령권한대행까지 했다.
낱씨가 바꾼 농수산
백한성씨 같은 이는 변영태총리가 제9회 유엔총회에 참석하는 동안만 임시 총리서리직을 맡은 일도 있다.
장관의 평균재임기간이 1년4개월인데 비해 총리 평균재임기간은 1년7개월로 총리가 약간 더 긴셈.
한자리에서 가장 오래 재직한 장관은 최형섭 전과기처장관으로 7년6개월이고 다음이 이석제 전총무처강관의 5년10개월. 3위는 3명인데 남덕우(재무)·이호(법무)·김성은(국방)씨로 모두 똑같이 4년11개월씩이었다.
다임장당수 특징은 대체로 ▲원만 한인간관계형 ▲웃사람에게 잘보이는 형 ▲뛰어난 전문지식형 ▲성실·청렴결백형 등이 꼽힌다.
전문지식으로 가장 덕을 본 케이스는 남덕우총리라 할 수 있다.
해HL출장때 남은 여비는 반드시 국고로 반납했다는 변영태씨 같은 분이 청렴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장관이 됐다고 축하인사를 받다가 한달도 못돼 그만둔 장관도 14명이나 된다.
최단명 장관은 자유당때 5일간 상공부장관을 지낸 박희현씨(54. 6. 30∼54. 7. 5)이고 그 다음으로 12일간 농수산부장관을 지낸 신중목씨다.
장관의 단명과 정권의 불안정도는 비례한다고 볼 수 있어 민주당때는 l개월 미만의 장관이 7명이나 된다.
정권별로 장관의 평균 재임기간울보면 제1공화국시절은 평균 1년3개월, 4·19후의 제 2공화국은 약3개월,3·4공화국은 1년8개월이었다.
5공화국에서는 장관을 자주 바꾸지 않는다는 전두환대통령의 생각때문에 장관들은 상당히 장수를 누릴 것으로 보인다.
부처별로 보면 내무부장관의 경질이 제일 심했다. 건국 이후 지금까지 42명의 장관이 부임했다.이중 박경원씨는 3차례 내무장관을 역임했다. 장관 1명의 평균 재임기간은 9개월 남짓인 셈이다.
더구나 4·19후 민주당정권에서는 집권 9개월동안 홍익표·이상철·현석호·신현돈·조재천씨 등 5명의 장관이 교대, 평균수명 1개월24암일이란 참담한 기록을 세웠다.
자리에 앉자마자 바뀌는 형세가 됐으니 당시의 치안상태가 어느 정도 였겠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내무장관 다음으로 교체가 심한 자리가 농수산부.
국토는 좁고 인구는 많은 우리나라에서 흉작만 들었다 하면 책임은, 농수산부장관에게 몰아가게 마련이었다.
장마가 나도 물러나야 하고 가뭄이 들어도 물러나야했다. 한때는 임명권자가 대통령이 아니라「날씨」였다고나 할는지….
조봉암장관을 초대장관으로 지금까지 33명이 거쳐가 평균 재임기간은 1년 남짓..
장관평균연령 50세
정부수립때 만든 부처중 가장 바람을 안탄 곳이 외무부. 지금까지 18대 16명의 장관이 부임해 평균 l년10개월의 장수를 누렸다.
특히 자유당 때에는 내무장관이 19명이나 들고난 반면 외무부는 단 4명만이 바뀌어 「외무 장수, 내무 단명」이란 징크스를 낳았다.
지금까지 4백24명의 장관가운에 여성장관은 단 3명뿐이다. 초대상공장관을 지낸 임영신씨와 52년10월부터 54년6월까지 무임소장관을 지낸 김현숙씨, 그리고 「10·26」이후 과도기때 김옥길씨가 잠깐 문교장관을 맡았다.
역대정권을 통해 장관의 평균연령은 50세전후가 가장 많았다. 총리의 평균연령 57세보다 약7세 낮은 셈이다.
최연소장관은 5·16후 34세에 공보장판을 지낸 임성희씨. 현재 민정당대표의원인 이재형씨가 52년 37세로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차관으로는 자유당시절까지는 37세에 법무차관이 된 홍진기씨가 최연소기록이었으나 민주당대정무차관제가 생기면서 34세로 우희창씨가 외무부정무차관이 되었다.
최연소 총리로는 백두진씨가 자유당시절 44세에 총리가 됐고 김종필씨가 45세로 그 다음이다.
총리·장관을 통틀어 최연장자는 최두선씨.
최씨는 5·16이후 재야원로라는 참신한 이미지때문에 69세에 처음이자 가장 높은 국무총리직을 맡았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발탁되고 기용됐는가.
역대정권별 장관의 전직을 보면 자유당 때는 관료출신이 23%로 가장 많고 오직이 16%, 그리고 독립운동 등 정치운동가 13%순이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신생국으로서 독립운동가의 정치참여는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민주당정권때는 관료출신 정치인이 34.5%로 급격히 늘어났고 당시는 내각책임제여서 거의 모두가 정치인이란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5·16군정때는 70%가 군인출신이었고 이는 제3공화국에도 영향을 주어 제3, 4공화국에서는 관료출신이 30%정도에 군인출신이 20%안팎을 항상 유지했다.
5공화국인 현내각의 총리·감사원장을 포함한 장관이상 23명의 출신배경은 △관료 9명 △군출신 6명 △업계출신 2명 △기타 언론인·노동가·정치인·은행가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사회가 다양화되고 그 다양화 추세에 맞추어 장관들도 다양한 직업속에서 충원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제3공화국 이후장관이 충원되는 주원은 관료와 군인인 것으로 나다났다.
발탁의 직접계기는 임명권자와 직·간접의 인연이나 주변과 각기관의 천거가 가장 많았던 것 같다.
초기 잠깐을 제외하고는 객관적 자질과 능력 등이 중시됐다 할 수 있다.
이대통령때는 초야에 묻힌 인재를 찾기 위한 아이디어로 중앙청 정문에 인물천거함을 설치한 적도 있다. 인물천거함에는 누구나 천거할 사람이 있으면 경력과 학벌·재능을 자세히 써넣도록 권장했다.
장관천거함도 설치
이대통령은 매주 토요일마다 천거함을 경무대로 가져가 직접 열어보았다.
이 인물천거함을 통해 발탁된 사람이 10대 농림장관 윤건중씨였다. 막상 장관발령을 내고보니 사람의 소재를 찾을 수 없어 전국에 수배해 겨우 전북 익산에서 농기구 장사하던 것을 찾아냈다.별안간 농림장관이 된 윤씨는 잠바차림에 3등 객차를 타고 상경해 농림행정을 맡았다.
윤씨의 그때 나이 59세. 일본·중국을 거쳐 독일에서도 약 4년동안 수학했으며 그 후 상해임시정부 국무원참사로 독립운동을 했던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발굴때의 화제와는 달리 불과 1개월24일 이라는 단명으로 장관직을 물러났다.
인물천거함이 별로 효과도 없이 조소거리가 되자 이박사는 반년만에 천거함을 없애버렸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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