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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유지 기본은 건강한 사법제도 섣부른 제도개편 논의 '개악'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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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인간이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없듯이 우리가 사는 사회도 법과 질서 없이는 하루도 유지되기 어렵다. 질서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정상적인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나 국가의 존속 내지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질서가 이렇게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다. 페리드 자카리아는 이라크를 둘러본 뒤 지난 5월 16일자 뉴스위크에 '산소 없는 나라'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라크에서 미국인 등 외국인, 그리고 이라크 정부 사람들이 무장단체의 테러로 불안에 떠는 것과는 별도로 일반 시민들도 각종 형사범죄가 빈발하는 전반적 무질서 상태에서 살고 있어 안전문제는 그들의 최대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이러한 무질서가 이라크의 모든 발전에 커다란 장애 요소가 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질서의 소중함은 몇 가지 역사적 경험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1991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났던 흑인폭동은 사흘간 40여 개 도시로 확산하면서 사망 55명, 부상 2383명, 재산피해 7억1700만 달러라는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2001년 12월 1일 아르헨티나 정부의 모라토리엄 선언과 예금인출제한조치에 성난 민심이 폭발해 전국에서 수십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또 77년 7월 13일 뉴욕 인근 콘에디슨 발전소의 낙뢰로 25시간 동안 뉴욕시내에 정전사태가 발생하면서 암흑을 틈타 점포 1700여 곳이 약탈당하고 살인.강도.강간.방화 등이 자행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예들은 질서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 얼마나 끔찍한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건전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회 각 분야에서 질서가 확립돼야 한다. 그중에서도 치안질서는 국민의 생명.신체.재산 보호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갖는다. 모든 나라에서 치안질서의 유지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 만족할 만한 수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올해 법무연수원에서 형사사법 국제연수과정에 참가했던 과테말라 판사.경찰과 이민국 간부들에 따르면 과테말라에서는 치안 부재가 심각해 자력 있는 개인은 모두 무장한 경호원을 고용해 자위책을 강구하고 있으며 야간에는 도심이 암흑으로 변해 외출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한국에서 밤중에 시민들이 두려움 없이 시내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전 세계적으로 일본이나 우리나라의 치안상태는 매우 양호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것은 범죄에 대응하는 형사사법제도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 제도의 장점에 대한 이해보다는 영미의 사법제도에 대한 지나친 기대로 형사소송제도를 바꾸자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미국 하와이대의 저명한 교수인 데이비드 존슨은 '일본식 정의'라는 저서를 통해 "일본의 범죄율이 낮은 것은 유능한 검찰제도에 있다"고 일본의 검찰제도 및 형사사법제도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또 "미국의 형사사법제도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 다른 나라에서 따라야 할 좋은 모델이 아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일본과 유사한 형사사법시스템을 갖고 있는 우리가 새삼 음미해야 할 경구라고 생각한다.

임내현 법무연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