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크리스토퍼 힐, 힘내세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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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아마도 지금 미국의 크리스토퍼 힐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무차관보는 워싱턴에서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보수파 사람들에게 6자회담을 다시 열어 북한과 핵에 관한 최후의 협상을 벌일 필요가 있고, 지난 1년의 어느 때보다 협상 전망이 밝다고 설득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힐의 보수파 설득은 다음주 큰 고비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안보보좌관, 딕 체니 부통령의 비서실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 한 말의 의미를 해부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전략회의에서 힐은 두 갈래의 논리를 펴야 한다. 하나는 한반도 비핵화는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유훈(遺訓)이고 북한은 7월에 6자회담에 복귀할 수도 있다고 한 김 위원장의 말이 꼭 시간벌기나 한국과 미국을 이간시킬 책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6자회담 재개의 분위기가 극적으로 호전되는 시기에 미국 관리들이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삼가 달라는 한국의 요청을 수용하자는 것이다.

북한은 확고부동한 1인지배 체제다. 북한이 2월에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고 고위 관리들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발언을 계속하여 6자회담을 거의 빈사(瀕死) 상태에 몰아넣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 특사에게 한반도 비핵화를 확인하고 6자회담 복귀 의사를 명백히 밝힌 것은 그에 앞선 모든 발언과 발표에 우선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힐이 주목하는 것은 김 위원장이 그런 발언을 하기에 이른 배경일 것이다. 북한은 지난 6개월 동안 심각한 국제적인 고립 속에서 핵을 가지고 계속 고립되어 살 것인지, 핵과 체제보장을 교환할 것인지에 관한 이견(異見) 조정에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미국이 한국에 배치한 스텔스 전폭기의 위협적인 모습과 핵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들의 경제참상이 떠올랐을 것이다. 일단은 후자로 방향을 잡고 정동영 장관 앞에서 세상에 공포한 게 아닐까.

힐은 부시 정부 안에서 한국의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힐이 공감하는 한국의 입장은 핵위기는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이나 유엔 안보리 회부 같은 강경수단보다는 6자회담과 남북대화, 북미대화 같은 외교적인 수단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어느 네티즌과의 인터넷 대화에서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을 만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북핵 문제에 국무차관보로서의 성패를 걸다시피 하고 있다.

미국의 국무차관이 지금 같은 중요하고도 민감한 시기에 북한을 다시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부른 것은 분명히 미국 보수파의 사보타주 행위다. 부시가 노 대통령에게 북핵의 평화적인 해결원칙을 확인한 직후 나온 그런 말을 들으니 콜린 파월의 부재(不在)가 새삼 아쉽다. 파월이 떠난 자리를 힐이 채워주기 바라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부시가 외교라인의 '군기(軍紀)'를 잡아주는 것이다.

미국의 보수파들은 한국을 채찍은 버리고 당근만 가지고 북한 달래기에 매달리는 유화주의 집단으로 인식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의 가장 큰 불만은 한국이 핵문제와 남북대화를 분리해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은 북한 눈치를 보느라 북한 지원을 핵문제 해결의 지렛대로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불만이다. 그러나 김정일.정동영 회담에서 핵문제가 논의의 대상이 되었으니 미국은 이제 그런 불만을 거둬들여야 한다. 한국의 대북정책에서도 마침내 남북대화와 핵문제의 접점을 찾은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변화다. 한국 정부는 이 점을 미국에 적극 세일즈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힐의 역할이다. 한.미 정상회담과 남북대화 재개의 토대 위에서 힐의 핵문제 인식과 처방이 워싱턴에 널리 확산되어 일단 6자회담이 재개되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북한은 힐을 초청하여 생산적인 6자회담을 위한 신뢰 쌓기의 기초를 닦기 바란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