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때 주한미대이대사 마셜·그린씨 증언|박소장 거사계획 사전엔 몰랐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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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불과 20여년 전의 격변기였던 4·19와 5·16때 주한미대사관의 정치담당관과 대리대사를 지낸「마셜·그린」씨(65·현 국무성고문)가 당시에 겪었던 일의 일부를 공개했다. 일요일(7일)아침, 서울정동 미대사관저에서「워커」대사, 「스나이더」전대사와 함께 담소하던 「그린」씨는 비행기 탈 시간을 앞두고 인터뷰에 응했다. 한미수교 1백주년기념 강연회에 참석차 지난4일 내한한 그는 이날 귀국했다. 「그린」씨는 이승만전대통령이 앞날을 내다보는 정책을 펴지 못한데 미국이 크게 우려했으나,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당시「매카나기」대사가 이박사의 하야를 권고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또 군사혁명 이전에 군부의 불만에 관한 정보는 있었지만 수시로 나돈 소문이었기 때문에 혁명에 대한 정확한 사전정보는 없었다고 말하고, 당시 박정희소장과의 첫 회합의 분위기가 대단히 냉랭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윤보선대통령은 군부내의 대결이 북괴의 도발을 촉발하게될까 크게 우려했으며, 자신은 윤대통령에게 군부와 장내각간의 타협으로 사태해결을 건의했다고 말했다. 「그린」씨는 박장군과의 관계가 서서히 호전됐으나 군부의 혁명동기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인터뷰=김재혁 기자>
- 4·19전에 한국의 정세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었읍니까.
▲먼저 60년 초의 사정을 말씀드리지요.
우리는 당시 한국정부와 몇 가지 경제문제를 두고 협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군용소프트웨어의 가격문제라든가 달러환율 현실화문제 같은 것이었지요. 정치적으로는 일본어선의 한국근해 어로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승만대통령의태도가 문제였습니다. 이대통령은 위대한 애국자였고, 우리가 모두 인정하듯이 이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신 분입니다. 그러한 이대통령도 연로해지자 앞날을 내다본다기보다는 점점 과거에 집착하는 태도를 보였읍니다.
당시 한국은 곡 이룩해야만할 많은 일이 가로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대통령이 연로해질수록 그 시기가 점점 늦어지고 또 세대간의 분열이 심화되고 혼란이 가중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읍니다. 미국은 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한국을 지원하고 있었거든요.
- 혹시 미국이 이대통령에게 물러날 것을 권유한 적이 있읍니까.
▲이대통령이 점차 연로해지자 미국에 있는 그의 친구들은 그가 물러나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읍니다. 미네소타주 출신 「월버트·저드」의원 같은 이박사의 오랜 친구는 그런 의견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1959년께이지요.
4·19이후 당시「매카나기」대사가 이박사의 하야를 권고했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물론 우리 대사관측도 이대통령이 친구의 자문을 받아들일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읍니다만, 외교관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지요.
4·19이후에「매카나기」대사가 당시 경무대로 이대통령을 방문 했습니다. 그 회담의 대화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대통령께서 이미 물러나기로 스스로 최종결정, 아니면 잠정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매카나기」대사에게 하야를 설득당했다기보다는 나는 이박사가 물러날 것을 스스로 결정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타이밍상으로는 이런 해석도 가능합니다. 이대통령이 24시간이내, 아니면 48시간 이내에 자신의 사임을 발표할 예정이었는데, 「매카나기」대사가 유혈사태의 확대를 피하기 위해 『지금 발표하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정도의 권유는 했을지는 모르지요. 「매카나기」대사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지금까지도 알려진 것이 없읍니다.
- 미국은 당시 허정과도정부를 지지했읍니까.
▲물론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중의 하나는 한국전 발발 10주년을 맞아 60년 6월「아이젠하워」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는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의논할 국가수반이 필요했읍니다.
- 당시 허정과도정부가 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있었읍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옹립되지 않았읍니다.
어떤 면에선 마지못해 국가수반직을 대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통령권한 대행으로 불려지지도 않았지요.
- 장면총리 집권초기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대단히 관심을 끈 기간이었지요. 내기역도 생생합니다. 장총리는 미국에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가톨릭이어서 교회내에 친구가 많았고 또 주미대사를 지냈기 때문이지요.
그는 매우 훌륭했고 좋아할 만한 사람이었읍니다만, 강력한 지도자는 아니었지요. 그는 온화한 성품에 합리적이었지만, 위기에 처해서 어려운 결정을 내릴만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간혹 우려를 했읍니다. 또 윤보선대통령과 그렇게 친밀하지도 못했습니다. 일부 학생들이 북쪽으로 가자는 주장을 하는 등 여러 가지 불안요인이 장총리의 입장을약화시킨 원인이 됐읍니다.
- 장면총리는 군부를 효과적으로 장악했읍니까.
▲한국은 독특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한국군의 작전권은 유엔군사령부휘하에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한국군부대라도 한국정부나 유엔군사령부에 반기를 들지 못할 것으로 보였읍니다. 당시 매매로 군부내의 불만의 소리가 들려왔고. 잠재적인 불만과 불화의 요소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년동안 그러한 소문에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읍니다.
- 5·16군사혁명에 관해서 인데, 당시 대사관의 미국중앙정보부(CIA)책임자「피어·드·실바」씨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여 보고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그랬다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러한 보고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의 보고가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런 류의 보고는 우리가 수시로 입수한 일련의 보고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보고를 받을 때 마다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신경이 계속 곤두선 상태에 빠지게 됐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당시별로 관심을 끌만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읍니다.
- 5·16혁명 직후 미국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읍니까.
▲초기에 워싱턴은 침묵상태였지요.「케네디」대통령과 「러스크」국무장관이 마침 캐나다를 방문중이었고, 국무장관을 대행한「체스터볼즈」차관이 사태판단을 하지 못한 것이 그 이유의 하나였음니다. 또 다른 이유는 국무성과 국방성의 견해차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민선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국무성은 나의 입장을 지지했습니다. 12시간이내에 나는 국무성의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국무성과 그리고 극동과는 내가 취한 조치를 지지한다는 것이었어요.
18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각지에서 기자들이 몰려왔읍니다. 워싱턴스타지같은 일부신문은 내가 취한 조치에 비판적이었고, 워싱턴프스트, 뉴욕타임즈, 세인트루이스 포스트같은 신문은 내입장을 지지했지요.
그러나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국정부와의 교섭을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였읍니다.
- 윤대통령을 만나셨지요.
▲혁명이 났던 날 낮에 윤대통령을 청와대로 방문하여 3∼4시간동안 상의했습니다. 당시 윤대통령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만약 군부끼리 충돌한다면 북괴의 위협이 예상되고, 윤대통령은 그 문제를 고려해야했읍니다. 윤대통령은 또 헌정상의 문제도 고려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장총리 이하 내각의 행방을 몰랐읍니다. 당시 윤대통령은 매우 고독했는데, 내가 여러가지 말씀을 드렸지요.
나는 당시 나이 젊은 관리였고, 꽤나 순진했습니다. 내가 건의한 것은 양측의 타협이었습니다. 쿠데타의 주동자와 내각이 자리를 함께 하여 시정할 점이 무엇인지 의견을 듣고 그걸 시정하고 군인은 원대복귀하도록 타협해야 한다는 자못 중국식 발상이었지요. 그런 내 의견은 비현실적이었읍니다만 어쨌든 타협을 모색하려고 건의했읍니다.
얼마 뒤 내가 요청해서 박정희장군을 만났습니다. 윤태일서울시장과 셋이서 어떤 조촐한 음식점의 방에서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우호적인 회합은 아니었읍니다. 분위기는 매우 냉랭했고, 아마도 박장군은 나를 의심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 현안문제에 관해 솔직한 견해를 나누었읍니다.
- 당시 미국이 가장 우려했던 점은 무엇이었읍니까.
▲우리가 우려했던 것은 혁명그룹의 성격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실여부는 둘째치고 여러가지 소문이 나돌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혁명그룹내에 공산주의 세력이 관련됐다는 풍문이었읍니다.
회합이 끝날 무렵 그는 웃으면서 악수를 청해왔읍니다. 나는 대사관에 돌아와 새벽 2시까지 본국 정부에 장문의 보고서를 보냈읍니다.
우리는 신뢰하기 시작했읍니다만 그때까지도 나에게 의문으로 남은 것은 그의 혁명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이었읍니다. 왜 정권을 장악하려는 것인지 그 동기를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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