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87>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드디어 부비트랩이 터진다. 폭음과 비명 소리와 화약 연기가 숲에 가득 찬다. 모두 혼비백산하여 엎드렸다가 일어나 보면 터뜨린 장본인은 찢겨져서 나무 둥치나 가지에 사지가 날아가 걸려 있고 몇몇은 팔다리가 떨어진 채 부들부들 떨며 고함을 지르고 널브러져 있다. 사태를 수습하려면 우선 부상자부터 응급조치하고 무선으로 헬기를 부른다. 헬기가 날아와 담가를 내려주고 거기에 부상자와 피투성이의 시체를 실어 후송을 시키고 나면 병사들 전원이 눈에 핏발이 서고 적개심으로 끓어오르게 된다. 거의 미쳐 버린 상태에서 과감한 마을 진입이 시작된다.

파리에서의 평화협상 때에 북베트남과 민족해방전선 측은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 측의 양민학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케이스별로 자료를 제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전선이 따로 없이 농촌과 도시 곳곳에서 정규적 군사행위와 더불어 진행된 게릴라전의 특성상 구분을 하기가 어려웠다. 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미군 사령부는 농촌에서 전국적으로 전략촌 사업을 벌이면서 미군이 지정한 지역 이외의 모든 숲과 논밭이며 심지어는 작전구역 안의 마을마저 '자유발포지역'으로 선포했다. 도로는 초소와 방어진지의 점으로 이루어진 끊어진 선에 불과했다. 밤이 되면 외국군 병사 그 누구도 소총을 겨누고 있는 자신의 참호 바깥 광대한 세상이 모두 적이 장악한 지역으로 변해 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를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는 '표범 무늬'라고 하여 자신의 작전 용어로 표현했다. 즉 외국군은 무장한 병사들뿐 아니라 적대적인 베트남 민중을 적으로 하여 싸웠고 그들에 의하여 사방으로 포위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자유롭게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당시의 미군 측 보도 자료에 나온 것만으로도 우리가 거기서 무엇을 했는지 분명해진다. 베트콩이라고 했지만 그것이 마을에서 죽어간 이름없는 농부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귀를 잘라 말려서 끈에 꿰어 수집한 병사도 있었고, 자른 머리를 들고 사진을 찍은 어린 병사들도 있었다. 여성에 대한 강간 살해는 여러 케이스가 보이는데 수류탄을 그곳에 넣어 터뜨리거나 심지어는 뱀을 넣은 경우도 있다. 헬기의 기관총 사수들은 들판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논두렁을 걷는 농민들을 향해 사파리처럼 사냥 내기를 한 적도 있었다. 사실은 밀라이 학살 사건도 베트남 전장에서의 일상적인 여러 가혹행위 중에 작은 사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그대로 한국군에도 해당이 되는 얘기였다. 나는 한국전쟁 이래로 이러한 폭력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었고 베트남 전쟁으로 심화하면서 몇 년 뒤에 광주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백주의 살육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믿는다. 특히 베트남 전쟁은 우리가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타자에게 폭력을 가한 첫 케이스로 툭하면 일본의 과거를 쳐들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돌아보지 않고 있는 셈이다.

'모조리 요리해!'라는 말은 상대 측의 저항으로 사상자가 많이 나온 마을에서 진입이 정체되면 나오는 자연스러운 명령이었다. 어느 부대는 사람은 물론 소나 돼지 심지어는 닭까지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남겨두지 않는 것으로 본보기를 삼기도 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