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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의 입' 9년] 7. 7대 대통령 선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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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1971년 4월 부산 유세에서 공화당 후보인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청와대 공보비서실의 최대 숙제는 김대중 야당 후보의 정력적인 '선동 연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야당 후보로 선출(70년 10월 16일)되자마자 기자회견을 통해 향토예비군을 폐지하고 한국의 방위는 미국.소련.중국.일본 등 4대국의 보장에 의존해야 한다는 등 안보 문제를 들고나왔던 것이다.

청와대는 김 후보의 이러한 4대국 보장론이 국민에게 혼돈과 불안감을 안겨주리라고 판단했다. 불과 2년 전 김신조를 포함한 북한 특공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고, 북한이 미군 함정 푸에블로호를 공해상에서 납치했다. 북한이 미군 정찰기 EC-121를 격추한 사건도 있었다. 국민은 이런 연속적인 무력 도발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데 안보를 공산국가들이 포함된 4대국의 보장에 맡긴다니, 이는 무책임한 논리라고 청와대는 생각한 것이다.

김대중씨는 두뇌 회전이 빠르기로 정평이 나 있는 정치인이다. 그러나 이때만은 회전이 너무 빨랐던 것같다. 물론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긴장 완화의 추세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추세가 세계적 조류가 되려면 수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 걸릴 지 누구도 속단할 수 없었다. 더욱이 긴장 완화의 틀이 극동지역까지 파급되어 자리잡으려면 더 오랜 세월이 필요함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김 후보는 이를 이번 선거에 당장 써먹으려고 한 것이다. 식자우환이 아닐 수 없었다. 과속도 이만저만한 과속이 아니었다.

일각의 주장대로 세계적 냉전 체제가 해체되었다는 최근에도 우리 국민은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베이징 6자회담이 원만히 진척되지 못하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보다 상황이 훨씬 안 좋았던 71년에 4대국 보장론이 나왔으니….

당시 김대중 후보는 대한민국의 안전을 미국.소련.중국.일본 4대국의 보장에 의존하자고 했는데, 요즘엔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미국에 정권의 안전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김정일 정권이 안보를 요구해야 할 대상은 미국이 아니라 북한의 인민인데 말이다.

71년 당시 4대 강국으로부터 보장받아야 할 대상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김일성 정권의 군사 도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면으로 당당히 김일성의 무력 도발을 분쇄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자고 국민에게 호소하는 것이 정치 지도자로서의 정도(正道)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세 연설문에 "나의 경쟁 상대는 북한의 김일성이다. 국내 후보자가 아니다"라는 내용을 우선적으로 넣었다. 의도적으로 김대중 후보를 무시하고 들어가는 것이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남은 문제점은 김대중 후보의 정력적인 유세였다. 그는 하루 두 번씩 유세를 하고 틈나는 대로 수행 기자들과 회견을 하면서 연일 따발총을 쏘아댔다. 그래서 제7대 대통령 선거는 선거법에 따른 공식 선거전에 들어가기 전부터 과열됐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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