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미국의 팔레비 이후 대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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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호메이니」는 「팔레비」국왕의 출국(79년 1월16일)이후 이란으로 돌아가 7개월만에 사실상의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가 귀국한 79년 1월31일부터 회교공화국헌법의 초안이 만들어진 그해 9월 사이에 「호메이니」는 그의 지도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이런 사태를 과연 누가 예견했을까. 「카터」대통령은 「팔레비」가 출국하기 4개월 전인 78년 9월10일 국왕과의 전화에서 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하고 자유화조치를 권고했음이 본사가 입수한 미 극비문서 책자의 보고서에 나타나 있다(극비문서책자 제7책 232페이지). 그러나 불과 4개월 후에 「팔레비」는 미국의 강권에 따라 출국해야 했고 미국의 이런 태도는 회교세력이 아닌 중산층엘리트에 의해 정권교체가 이뤄질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고 비밀문서들이 밝히고있다(시리즈10회 참조).

<호메이니 사면령>
미국의 대 이란 정책이 일관성을 잃고있었다는 사실은 극비문서책자의 여러 문서들이 입증하고 있다.
주이란 미국대사관이 국무성에 보낸 78년 10월31일자의 한 보고서(전망)는 「팔레비」의 퇴위에 관해 언급하고있다.
『왕정지지파들은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악화됐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팔레비」텔리비전과 같은 언론매체를 통해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기에는 국민의 수준이 아직 미숙하다고 생각하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바람직한 대안은 국왕이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설정하는 길뿐이다. 그렇지 않고는 거리의 데모사태를 누를 방도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보고서는 「처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왕조의 존속을 전제로 황태자에의 양위를 대안으로 건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1개월 반전인 78년 9월18일자 미CIA(중앙정보국) 비밀보고서는 「팔레비」이후(극비문서책자 제 13책 59페이지 이하)를 진단하고 있다. 이 보고서도 물론 「팔레비」 왕조의 붕괴를 예견하지 못했다. 다만 「샤」(팔레비) 이후의 통치방식이 「팔레비」유형의 독재로는 어려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자유화 조치가 계속 추진되면 이란과 미국에 모두 유익할 것이다. 이런조치를 춰해야만 「샤」이후에 누가 정권을 담당하든 이란의 정치정세가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유화조치는 강력히 추진돼야 할 것이다.』
미CIA의 이러한 견해는「카터」가「팔레비」와의 통화(78년 9월10일)에서 권고한 내용과 일치한다.
이런 극비 문서들이 워싱턴에 보고되고 있을 무렵 이란의 사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팔레비」는 78년 10월26일 그의 59회 생일을 맞아 「호메이니」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정치범 1천1백26명을 석방했다. 「카터」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는지의 여부를 가릴 비밀문서는 없으나 그러한 조치가 「카터」의 희망과도 맞아 떨어졌다.

<"팔레비에 죽음을">
그러나 「호메이니」는 「팔레비」의 사면령을 수락하지 않았고, 감옥에서 풀려난 정치범들은 『「팔레비」에게 죽음을』하고 소리높이 외쳤다. 「호메이니」의 요구에 좇아 이란전역에 총파업이 단행됐다. 원유생산은 5분의1로 줄어들어 하루에 6천만달러씩의 손해를 보았다.
78년 11월5일 테헤란시내에서 사상최대의 데모가 벌어졌다. 영화관·항공사·영국대사관 상무관사무실 등이 불타고 시내 곳곳에서 학생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란군 참모총장 「골람·레자·아자리」장군은 니아바란궁으로 들어가 「팔레비」국왕에게 군사정부의 수립을 요구했다(미 국무성에 보낸 테헤란 미 대사관의 보고서).
11월6일 「아자리」장군은 수상에 임명돼 사태수습에 나섰으며 「팔레비」국왕은 TV방송을 통해 『나는 헌정수호자로서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고 다짐했다. 「팔레비」는 군사정부를 세워 질서가 회복되면 즉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새 정부에 대권을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유혈의 강물』을 외친「호메이니」는 끝까지 「팔레비」에게 죽음을』요구했고, 마침내「팔레비」는 79년1월16일 이란 땅을 떠나야했다.

<파라 왕비 섭정도>
미CIA는「팔레비」가 축출되기 3년전인 76년 2월 「팔레비」후계자 문제에 관한 극비보고서를 작성했다(극비문서책자 제7책 145페이지 이하).
황태자 「레자·팔레비」가 만20세가 되는 80년(10월31일) 이전 국왕의 유고와 그 이후 유고 등 두 경우를 다음과 같이 상정하고있다.
80년 이전에 「팔레비」유고의 경우에는 「파라」왕비가 섭정이 되고 수상, 상하양원의장, 대법원장 및 왕비가 위촉하는 4명의 인사로 섭정 위원회가 구성된다.
이 섭정위는 국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 존속한다. 현대화의 추진세력인 이란군과 관료조직이 합법적인 후계자의 지주가 될 것이다. 정부형태는 연립정부가 될 것이며 만약 연정수립에 실패하면 혼란이 예상된다. 이 경우 좌우극단세력이 활동을 강화할 우려가 있고 동시에 군의 정치간여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되면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날 것이다.
이란의 장래를 위해서는 중산층과 관료조직이 결속돼야한다.
이에 앞서 현 여당인 부활당이 상하원에서 국민의 지지로 다수의석을 차지할 수 있어야한다.
만약 국왕·왕비 및 황태자가 한꺼번에 유고일 경우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자신의 왕조를 창건하거나 왕조를 폐지하고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새 지도자는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고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추구할 것이다. 따라서 서방측과의 관계가 약화되고 소련과의 관계가 보다 두터워질 것이다.
만일 「팔레비」가 10년 정도 더 집권한다면 정권이양 과정은 보다 안정될 것이다.

<성직자·대중분리>
이 기간에 회교 성직자의 영향력은 더욱 약화될 것이다.
이렇게 지적한 CIA보고서는 특히 「팔레비」이후 소련과의 관계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샤」이후 소련의 개입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미국은 온건한 국내세력을 지원하여 그 영향력을 높여야한다고 이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CIA보고서는 바로 그 때(76년)가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할 적절한 시기라고 결론을 내렸다.
78년 6월에 작성된 테헤란 미국대사관의 한 비밀문서(이란-l977∼78년·극비문서책자 12책 114페이지 이하)는 「팔레비」의 왕위계승 준비에 관해 언급하고있다.
『「팔레비」는 황태자의 왕위계승과 왕조의 앞날을 위해 「호메이니」의 영도아래 있는 극단적인 성직자의 영향력으로부터 대중을 분리시키고 지식층이 좌경적 반대세력과 손을 잡지 못하도록 하고있다. 이러한 노력이 아직은 초기단계이며 성공여부도 더 두고 보아야한다.』
미CIA의 「팔레비」후계문제에 관한 극비보고서가 작성된 시기는 「카터」의 대통령취임 l년 전이었다. 극비문서에 나타난 미국의 이란관찰은 피상적이었고 「카터」행정부의 이란정책은 뒤뚱거리기만 했음이 그후 이란사태가 증명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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