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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9) <제76화>화맥인맥(58) (월전 장우성) 전후의 화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서울에 환도해서 보니 미술계는 사분 오열돼 있었다.
6·25의 소용돌이 속에서 화가의 수난이 컸기 때문이다.
이쾌대가 위원장, 이봉상이 사무장으로 있던「미술문화협회」는 이쾌대의 월북으로 자동 해산되었다.
미술문화협회의 일원이었던 수화(김환기)가 독일유학을 하고 돌아온 배운성, 조각가인 불재(윤효중), 당시 동양화단의 중진인 청전(이상범)·고암(이응노)과 손잡고「50년미협」을 만들어 그룹활동을 했다.
9·28수복 후에 이미 한차례 부역자심사라는 태풍이 지나간 후여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도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부역자 심사 때 심사위원을 한 춘곡(고희동)·우석(장 발)·설초(이종우)·하나(이순석)는 미술가 단합을 호소했지만 화가들이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 줄 몰랐다.
조사를 맡았던 이세득씨나 조사대상이 되었던 사람들도 이렇다할 감정 없이 괜히 소원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른바 도강파와 잔류파 사이에도 그렇게 유쾌하지가 못했다.
하지만 확고한 주견도 없이 부화뇌동(부화뇌동),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하면서 덤벙대던 화가들이 문제였다.
이런 기회주의자들은 눈치를 살피느라 환도 후에도 서울에 올라오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서울에 올라왔다 하더라도 떳떳지 못한 과거 때문에 은신해 있었다.
서로가 자중해야할 현실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6·25사변으로 3년 동안이나 걸렸던 제2회 국전(53년11월)이 추진되고 있었다. 미술계는 단합을 전제로「과거를 묻지 않고」실력 있는 화가를 심사위원으로 선출했다.
부역 실사 대상자였던 도상봉 김환기씨를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뽑아 6·25때문에 빚은 민족적 비극을 불식하는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박수근씨 같이 북에서 내려온 화가들의 국전 참여로 뜻깊은 민족예술의 축제가 되었다. 박수근씨는『집』과『노상에서』두 점을 출품,『집』이 특선의 영광을 안았다.
6·25를 겪은 후여서 그림 소재들이 전쟁을 다룬 것도 많았지만 추상작품이 출품되어 새로운 표현방법을 제시했다.
서양화가 김흥수씨의『침략자』와 변영원씨의『선·광-빌딩을 구성하는 주체』는 국전에 선보인 최초의 추상작품으로 현대적인 표현정신을 발양하는 기록을 세웠다.
2회 국전 때는 동양화부에서도 1회부터 심사위원을 맡은 춘곡·소정(변관식)·심산(노수현)·나 말고 1회 때 선전참여운운으로 심사위원에서 탈락되었던 청전이 심사위원에 뽑히고, 청전의 제자 제당(배 염)이 처음으로 심사에 참여했다.
서양화부는 설초·청구(이마동)·우석·김인승·도상봉·김환기씨가 심사위원을 맡았다.
조각부는 1회 때 김경승씨 혼자 했는데 2회 때는 김종영 윤효중씨 둘이서 심사했다. 불재는 친일·부역운운으로 고전했지만 부산피난 때 춘곡이 이끄는 대한미협에 적극 협력, 춘곡의 눈에 들어 중용한 케이스다.
공예부는 김진갑 장선희 이순석씨가 심사위원을 맡고, 서예부는 1회에 이어 영운(김용진)·소전(손재형)두 사람이 심사했다.
2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 말고 추천작가로 동양화부는 의재(허백련)를, 서양화부는 박영선 조병덕 이병규 박득순씨를, 공예부는 김재석씨를, 서예부는 시암(배길기)과 일중(김충현)을 뽑았다.
이 때 영예의 대통령상은『만추』를 그린 서양화가 이 준씨가 차지했다.
이 준씨는 당시 34세의 청년작가로 숙명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만추』는 비원 낙선재 건너편의 희우루에서 고궁의 가을빛을 그린 것이었다. 차석인 국무총리상은 나의 제자인 남정(박노수)에게 돌아갔다.
남정이 그린『청상부』는 까만 치마저고리가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는 여인상이었다.
남정은 이때 서울대미술대학을 갓 졸업한 신인이었다.
문교부장관상은 허정두씨의『귀가』(동양화), 이세득씨의『군상』(서양화), 김기승씨의 『해서칠언대련』(서예)등이 차지했다.
동양화부에서 문교부장관상을 받은 허정두씨는 의재의 제자-. 그림 실력도 있었다.
그가 트럭전복사고로 비명에 간 일은 동양화단의 큰 손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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