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눈감고 귀막고 어디로 가는 건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현 정부가 몰매를 맞고 있다. 언론과 야당, 그리고 시장.지사가 연일 펀치를 날린다. 여당의 매질도 아프다. 술자리의 육두문자는 옮기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쏟아지는 불만을 요약하면 이렇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있느냐."

놀라운 것은 이 정도 맞으면 달라질 법도 한데 그 모양 그대로라는 사실이다. 맷집이 좋은 걸까. 몰매를 버틸 정도의 강건한 체력이라면 그래도 안심할 수 있겠다. 그러나 추락하는 경제와 흔들리는 대외정책, 측근들의 터무니없는 행각을 보면 약체도 이런 약체가 없다. 이러다 그냥 주저앉는 게 아닌지 안쓰럽고 걱정된다. 그 화(禍)는 고스란히 나라와 국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비판에 귀 막고, 잘못에 눈감기는 이 정부 출범부터의 특성이긴 하다. 최근의 행담도 의혹 사건만 해도 그렇다. 청와대 인사들이 줄줄이 관련돼 세상이 시끄러웠는데도 감사결과 발표가 나오고서야 마지못해 "유감스럽고 죄송하다"는 한마디로 끝이다. 오히려 언론의 문제 제기를 "상괘를 벗어난 광풍"이라며 핏대를 올리고 있다.

행담도 사건은 동북아시대위원회가 개입됨으로써 현 정권 거버넌스의 특징으로 꼽히는 청와대 위원회의 기능과 역할에 자연스레 눈길을 돌리게 했다. 들여다보니 문제 투성이다. 주무부처를 제쳐놓은 월권과 그에 따른 업무 혼선이 숱하게 지적됐다. 국제정치 전문가가 건설사업에 손을 댄 자체도 어처구니없다. 아마추어리즘으로 질타당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청와대 측은 잘못이 없단다. '위원회가 희망이다'(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라는 글에선 "실상을 모르거나, 과거 독재시대 정부의 모습에 익숙한 데서 오는 비판"이라고 우겼다. 많이 듣던 '네 탓' 타령이다.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비판엔 "위원회 학자들은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라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정부 중요 정책마다 훨씬 많은 '최고 전문가'가 반대 주장을 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려나. '최고 전문가' 중에서 입맛 맞고 '꿍짝' 맞는 인사들만 골라 모은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물론 비판에도 잘못이 있을 수 있고, 언론이 위원회의 장점을 간과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동북아위처럼 엄연히 현실로 나타난 잘못에 대해선 인정부터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이 기회에 위원회 중 정리할 곳은 없는지, 정부 부처와의 기능 중복은 또 없는지, 옥상옥이라 정책 혼선을 부른다는데 사실인지, 군림 기관이 된 것은 아닌지 등 세심하게 점검하는 겸허한 자세가 아쉽다.

명백한 실패를 두고도 인정하지 않기는 부동산 정책도 마찬가지다. 때려잡겠다는 강남 아파트값은 더 뛰고, 강남도 모자라 수도권으로 확산하고, 땅값까지 전국적으로 들썩이는 데도 "정책은 잘못된 게 없다"고 뻗댄다. 전문가들의 비판엔 "조급하지 말고" 기다리란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책임질 일이 없다. 가뜩이나 현 정부가 실험 중인 분권형 대통령제를 두고 대통령과 총리 간 역할 경계가 모호함으로써 '대통령 무책임제'로 변형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부동산 정책을 비롯한 중요 정책은 사실상 청와대에서 실질적으로 주무르지만 잘못이 있을 땐 화살이 총리나 주무 장관에게로 돌아가게 돼 있다. 대통령은 '일반 행정을 총괄하는' 총리의 방패 뒤에 몸을 숨길 수 있는 매우 편리한 제도다.

눈감고, 귀 막은 채 책임도 지지 않는 정부라면 국민이 희망을 걸 수 있을까.

질문사고(question thinking)의 창시자 마릴리 애덤스는 사람의 유형을 '심판자'형과 '학습자'형으로 분류하고 유형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비교했다. 심판자 유형은 '누구 탓이지?''왜 날 괴롭히지?''그들은 왜 그렇게 어리석을까?'라고 묻는 반면 학습자는 '내가 책임질 일은 뭘까?''이 상황을 달리 생각할 수는 없을까?''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원할까?'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심판자의 질문은 스스로를 절망과 무기력.패배감으로 몰아넣지만, 학습자의 질문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성공의 길로 이끈다고 그는 주장했다('삶을 변화시키는 질문의 기술', 정명진 역, 김영사).

현 정부도 심판자적 기질이 농후하다는 느낌이다. 지금부터라도 학습자적 질문을 던져가며 '성공의 길'로 들어서길 권하고 싶다.

"무엇이 문제일까?"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닐까?" "서투르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허남진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