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유홍준 청장의 부적절한 처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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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평양 6.15 통일대축전에 정부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만찬장에서 북한의 전쟁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의 주제가를 불렀다. 유 청장은 북측 보건상과 이 영화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그가 "한번 불러보시라"고 하자 응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 때 한.미 연합군에 침투한 북한 간첩들의 활동상을 그리고 있다. 그 메시지는 북한이 도발한 '해방전쟁'의 당위성과 미국에 대한 분노 유발이다. 이런 영화의 주제가를 북한 당국자가 권유한다고 해서 '서슴없이'부른 것은 매우 부적절한 처신이다.

북한 노래라고 무조건 금기시하던 시대는 지났다.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라면 못 부를 것도 없다. 그것이 바로 자유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고위 공직자다. 그 공직자가 평양에서 벌어진 공식 만찬장에서 한국전쟁 당시 한.미군을 교란한 북한 전쟁영웅을 칭송하는 영화 주제가를 불렀다니 바로 그게 문제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통성은 무엇이 되며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은 무엇인가. 어떻게 이런 처신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혹시 민간인이 비공식적인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그랬다면 이해할 수 있다. 혹시 유 청장도 그런 가벼운 마음에서 불렀는지도 모른다. 또 주위에서 권하니 앞뒤 생각지 않고 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오랜 교수생활로 공직의 의미에 대해 미숙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정부 대표로 평양을 방문 중이다. 자유롭게 처신할 수 있는 교수 신분이 아닌 것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이 나라를 대표한다. 그렇다면 이 정부는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이 북한과 똑같다는 말인가.

북한에 대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좀 더 '대범한 자세'로 북한을 대해야 남북 관계를 한 단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유 청장의 이번 처신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유 청장의 부적절한 행위는 남북 관계 진전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라.